Les Li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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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2010-01-04)   즐겨찾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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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Mobile 약을 먹었다.


안 지 4년 정도 된 오빠가 있다.
지난 10월에는 친한 사람들과 만날 때 불러서 함께 자리한 적도 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딱히 실수도 없었고 해서 나름 신뢰를 쌓았다.


1월 1일이 그 오빠 생일인데, 이번의 연말에는 약속이 없다며 우울하다고 말일에 놀아달라고 했다가, 사정이 생겼다며 2일날 보자길래 그러자고 했다.

불면증세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지 좀 됐다. 그 오빠는 처음 알 때부터 불면증이 심했고 지금도 약을 달고 사는데, 자기 약을 나눠 줄테니 반 알씩 먹으라길래 알겠다고 정말 자야 할 때 먹겠다고 했다. 약의 내성과 중독을 두려워하는 내가 그 약을 정말 먹을 일은 없겠지만 일단은 그러겠다고 했다.



2일 저녁.
그 오빠가 먼저 도착해 있던 역삼 앰배서더 호텔 라운지 바로 갔다.
조니워커 블랙라벨을 마시고 있었다. 술도 약하고 양주 싫어서 한 잔 받아서 얼음잔에 물 왕창 붓고 가끔 짠을 권할 때나 입술 적시는 수준으로 마셨다. 뭐 거의 안 마셨다는 말이다.

같이 있는 동안 영상이나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보냈다. 몰래 만나는 느낌 주기도 싫었고 다 같이 아는 사이니까 함께 있는 느낌을 받고 싶었다.


그 오빠가 혼자 양주 한 병을 비웠고, 밖으로 나왔을 때 맥주 한 잔 더 하자는 말에 시간도 늦지 않았고 해서 알겠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언주역에 내렸다. 따라간 곳은 그 오빠가 묵고 있다는(에어비앤비 일을 하는데 본인 집도 사용중이라 예약 잡히면 종종 호텔 신세를 진다) 글래드라이브라는 호텔이었다.

자기는 호가든 사 놨다며 내가 마실 술 고르라길래 편의점에서 호로요이를 샀다.

호프 같은 데 갈 거라 생각했는데, 괜찮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 알기도 했고 그간 매너도 괜찮았고, 10월에 같이 봤던 사람들과 단톡에서도 만난다고 미리 고지해 둔 상태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1616호에 들어갔다.

생일선물로 받은 케익을 꺼내 접이식 테이블에 놓았다. 침대와 소파 사이에 테이블을 놓고 오빠는 침대에 나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케익을 먹을 젓가락이 없어 로비에 전화 걸어 젓가락을 주문했다.

단톡방에 친한 여자애랑 계속 톡을 주고받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중간중간 보고하듯 톡을 했다.


티비를 켜 놓고 술을 한 모금씩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주먹을 쥐고 내 손에 뭔가를 쥐어 준다. 손바닥을 보니 봉지에서 뜯은 낱알의 알약 두 개.
하나는 가늘고 길쭉한 모양의 흰색 약이고 다른 하나는 원 모양의 납작한 살구색 약이다. 살구색이 수면제고 흰색이 신경안정제란다.

그리고 약을 먹으라고 했다.
술을 먹었으니 못 먹지 않냐니 술 마시고 먹어도 되는 약이란다.
이따 먹겠다고 테이블에 내려 놓으니 지금 먹으란다.
집에 가서 먹겠다 하니 지금 먹으란다.
약 먹으면 몇 시간이나 자냐니까 4~6시간이라길래 지금 먹으면 어차피 일찍 깨서 못 자는 건 같으니까 집에 가서 자기 전에 먹겠다는데도 또 지금 여기서 먹으란다.

난감했다.
티슈 하나를 뽑아서 약을 올려 놓고 말없이 싸고 있으니 표정이 일그러지며 '너 안 건드려' 라고 억울하다는 듯 말한다.
뭐 꼭 그런 걸 걱정한 건 아닌데.. 무안했다.

그래서 결국 약을 먹었다. 정말로 먹었는지 묻길래 그렇다고 했다.
보통 감기약이나 진통제도 먹으면 한 시간 정도부터 효과가 나타났던 걸 떠올려서, 집에 가야겠다 생각을 했다.

친구에게도 약을 먹었다고 톡을 남겼다. 친구가 걱정하며 정신은 똑바로 차리고 있지? 라고 물었고 응 너 안 건드려 라길래 무안해서 먹었어 ㅋㅋㅋㅋㅋ 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기가 언주역이니까 9호선이...'
집에 갈 궁리를 하고 있는데 그 오빠가 갑자기 '너 집에 못 가' 란다.

'그거 졸피뎀 알파야'
'지하철 타고 가면 돼~'
'안 돼 필름 끊겨'
'괜찮아 갈 수 있어'
'안 돼 먹고 30분~1시간 있으면 바로 효과 나타나 위험해'
'그럼 택시 타고 갈게'
'안 돼 진짜 필름 끊겨 위험해'
'그럼 이 약을 왜 먹으라고 한 거야?'
'자고 가'


당황스러웠다. 내가 자꾸 집에 가겠다고 하자 손에 든 폰을 뺏어들었다. 연락수단이 없으면 안 되니까 일단은 지금 안 간다고 말하고 돌려 받았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내가 잠잠해지자 그 오빠도 자기도 먹겠다며 내 눈 앞에서 약 두 알을 먹었다.
도중에 나는 친구와 계속 톡을 나눴다.


약을 먹은 지 10분 정도 지나자 갑자기 술에 확 취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친구에게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25분 정도 되니 붕 뜬 것 같은 기분에 점점 정신이 없는 게 느껴졌다. 친구에게 남친 번호를 남겼다. 심각하지 않게 잘 말해 달라고 했다. 혼자서는 집에 못 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누가 날 데리러 오는 게 아니고서는'
'하 나 약효 더 생기는 것 같은데'

두 개의 톡을 보낸 이후의 기억이 없다.


이후 나는 의식을 잃었다.




친구는 자기가 보내는 톡이 1은 계속 없어지는데 오랫동안 대꾸가 없어 긴 글을 쓰는 중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3분 후에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여기가 언주역쪽 호텔이라는 것과 앰배서더 라운지바에 갔던 얘기를 했다. 술에 잔뜩 취한 사람처럼 횡설수설했다고 한다.
옆에 있는 오빠를 바꾸라고 큰소리로 말해 전화를 넘겼고, 마찬가지로 어눌한 상태로 전화를 받은 오빠는 뭉개지는 발음으로 호텔 이름과 호수를 말했다.

친구는 언주역, 호텔 뒷 이름으로 검색해 위치를 알아냈고 내 남친에게 전화해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하고 호텔 위치와 호수, 라운지바를 알려 줬다.

내가 라운지바를 재차 언급하자 정확히 내가 어디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남친이 친구와 함께 나를 찾으러 왔을 때 라운지바에 들르느라 시간을 허비했다고 했다.


호텔에 도착한 남친은 로비에서 그 오빠의 이름과 호수를 확인했으나 투숙객이 아니라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없어 찾으러 갈 수가 없었다.
로비에서는 손님이 '방해하지 말아달라' 는 메세지를 남겼으며 조금 전에 젓가락 두 개를 올려 달라 했다고 전했다.

경찰까지 불렀지만 호텔 규정이 그렇고 경찰도 당장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없어 그냥 돌아갔고, 남친은 친구와 고민하다 방을 예약하기로 했고 그건 또 호텔측에서 용인을 해 줬다.


바로 맞은 편에 방을 예약하고 올라가 1616호의 벨을 아무리 눌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티비 소리는 들리는데 인기척은 없었다.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문을 계속 두드리자 결국 그 오빠가 문을 열었다. 팬티 차림으로.

나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택시 타고 갔다고 했다. 그래서 안을 좀 봐도 되냐고 물으니 그러라고 하며 문을 열어 줬고, 자고 있는 나를 깨웠다. 그리고 횡설수설했는데, 자기가 나를 먼저 알았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마약 복용한 사람들처럼 둘 다 정신을 못 차렸다고.


이때의 기억이 잠깐 있다.
정신은 들었으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태에서, 누가 일으켜 세운 건지 내가 일어난 건지 현관쪽으로 향할 때 눈 앞에 낯선 남자(남친 친구)가 서 있었다.
이후 다시 필름이 끊겼다.



남친은 다시 경찰을 불렀다고 했다. 경찰도 폭력 사태가 걱정돼 출동했고, 남친과 남친 친구가 나를 부축해 맞은편 방으로 옮기고, 남친은 테이블 위에 늘어져있던 약 중에 가장 많은 약이 들어 있던 취침약 한 봉지를 챙겼다.
여경이 약에 대해 검색해 주기도 하고, 일단 자리 정리가 돼서 경찰은 철수했다.


다음날 아침 10시, 약 12시간 만에 남친이 깨워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고 잠에서 깰 수 있었다.
남친한테 보이스톡이 왔었지만 말 섞고 싶지 않아 받지 않았다고 했다.
내 폰에는 그 오빠의 '연락좀 줘' 라는 톡이 달랑 하나 와 있었다.

잠을 채 두 시간도 잘 수 없었던 남친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기운 때문인지 오후 내내 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클럽에 가입돼 있던 그 오빠는 내가 자는 동안 탈퇴를 했고, 단톡방에서도 나간 상태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버젓이 일상 글을 올리고 셀카를 찍어 올리고 닉네임을 여러 번 바꿨다.

나는 그 오빠에게 톡으로, 어제 왜 나에게 그 자리에서 그 약을 먹으라고 했냐고 물었다.
그러나 확인을 하지 않은 채로 계속 하던 일을 하고 있길래, 글 자꾸 올리지 말고 카톡 확인하라는 댓글을 남겼다.

메모도 해 뒀다며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아이폰은 녹음이 되지 않기 때문에 캡쳐본으로 보관하려는 목적으로 그냥 톡으로 하자고 했다가, 이전에 쓰던 폰의 녹음 기능을 켜 두고 전화를 걸었다.


그 오빠는 내가 잠 못 자고 피곤해 하길래 약 먹고 편하게 자고 가라고 하려고, 너무 편하고 동생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나를 건드릴 거였으면 나 따라 약을 복용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자기 딴에는 걱정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톡 답장이 없자 그냥 내가 나쁜 놈 하지 뭐 하고 생각하고 탈퇴했다고 했다.
방송에서 다룰 만큼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는 졸피뎀을 사전 고지하지 않은 점을 얘기하자 '그거 졸피뎀 아니야 스틸녹스야 내가 말 잘못한 거야' 라고 했다. 내가 먹은 약은 그에 비해 별거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사전에 말해 줬다면 내가 컨트롤할 수 있었고, 주변인을 안심시키든 도움을 청해 집에 갔을 거라고, 오빠랑 오래 알았고 믿었으니까 술도 마신 거지 상식적으로 남친도 있는데 여기서 자고 갈 거라고 생각한 건 잘못된 거라고.

'그건 미안해 그러면.'
옛다 하고 던져 주는 듯한 사과는 와 닿지 않았다.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얘기나 들어 보려고 전화했던 거라 통화 이후의 계획이 없었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끊었고 사정을 아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통화 이후에 더 마음이 복잡해진 것 같았다.

검색해 보니 졸피뎀과 스틸녹스의 성분은 같았다. 정도의 차이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으나 검색 자료들은 모두 같은 약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고 피검사나 소변검사 등을 진행해 자료를 확보하고 신고하라는 의견이 있어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하기 위해 여성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졸피뎀이 뭔지도 모른다. 데이트강간, 제2의 프로포폴이니 하는 말로 유명한 약이니 민원사례가 많을 것 같은데 의외였다.
개인적인 문제다, 알고 먹은 것 아니냐, 경찰에 민원 넣으라가 통화 내용이었다.

의료 관련 기관에 문의하려고 119에 전화를 했다. 담당 부서에 연결되는 데만 5분이 걸렸다.
23시간 전에 졸피뎀을 먹었다며 이야기를 했는데 시큰둥한 말투로 피검사 해도 다 배출됐을 거란다. 범죄사건 관련해서 기관에 의뢰하지 않는 이상 일반 피검사로는 나오지도 않을 거라고. 상당히 하찮은 것처럼 말을 하더니 끊었다.

피검사가 안 되더라도 녹취나 기타 자료들에 힘이 있을 거라는 주변 의견도 있었지만, 더 전화하고 말 것도 없었다. 이쯤 되니 이 다음까지 그려졌다. 경찰에 전화하면 왠지 역으로 피의자처럼 취조당하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강간 당한 것도 아닌데' 라는 말을 뱉을 것 같았다.
몇 년 전 수 개월 간 집단 악플에 시달리다 특정인을 고소해 검찰까지 넘어갔을 때, 검찰이 그랬다. 뭐 이깟 일을 가지고 자기들을 귀찮게 하냐는 듯한 말들. 피해 당사자의 감정을 이해하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로 강간 피해를 당한 여자들이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을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곽정은이 했다는 말처럼 '스스로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자초했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 수두룩할 걸 생각하니 소름끼쳤다.


그래서 이 글에 털어내는 것으로 잊기로 했다.

그저 별일 없던 게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게 내 최선이다.
'그러니까 왜 호텔에 따라 들어갔어'
사람을 믿은 게 잘못이고, 더 의심하지 않은 게 잘못이다.
그런 인식이 황당하고 답답해 우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람을 믿어 준 쪽이 죄인인 세상에 살고 있다.
끔찍한 사실만은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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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KR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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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04 11: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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