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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기창화백의 친일흔적

우리 미술계에 한 획을 그었다는 운보 김기창화백이 타계했다. 돌아가신 분께 대해 추모의 말을 올리지는 못할망정 욕된 과거를 들춰낸다는게 좋지 않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의 죽음으로 지난번의 과오를 되새겨보는 것도 역사의 교훈이 되리라 본다. 물론 지난번 미당 서정주 시인처럼 김기창화백이 적극적인 친일운동가였던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약력을 얘기하며 친일행각만 쏙 빼놓고 언급하는 처사는 올바르지 못하다. 적어도 두가지 약력의 흔적이라도 적어놓아야 할 것이다. -김기창 (金基昶) 1914∼2001//......1940년 '선전' 추천작가......1942년 반도총후미술전 추천작가 김기창은 1940년 '선전'에 친일화가인 스승 김은호의 추천으로 입선하다가 24세 때인 제16회 '선전'(1937)에 할머니의 옛얘기 를 듣는 아이들을 담은 [고담](古談)을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다음해에는 [여름날](夏日)로 '총독상'을 받고, 18·19회 '선전'에 계속 특선으로 입상되어, 연 4회 특선 경력으로 추천작가가 되었다. 스승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있었다지만 김기창의 재능은 젊은 나이에도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선전'의 추천작가가 되었다는 것은 친일행각의 대열에 합류하겠다는 의 미였으며 실제로 김기창은 일제군국주의에 동조하게 된다. 김기창은 '조선남화연맹전'(1940. 10)과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 1)를 비롯하여 김규진, 김은호, 이상범, 이한복, 허백련 등 대가급 친일 미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기금마련 전람회에 적극 협력하였다. 여기까지는 단순한 협력차 원으로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 고무하기 위한 선전작업에도 앞장서서 이런 추측을 무색하게 만 들었다. 이는 우선 신문·잡지류의 대중매체에 실린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에 게제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 43. 8. 6),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완전군장의 총후병사'(1944. 4)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축 입영(祝 入營)……'이라는 어깨띠를 두른 학도병 좌우에 갓 쓰고 안경 낀 연로한 아버지와 수건을 쓴 어머니가 수묵소묘 풍으로 그려진 삽화이며 1943년 8월부터 시행된 조선청년 징병제를 선전하기 위한 작품이다. 종군하게 되어 감격스러운 듯한 학 도병의 진지함과 장한 아들을 굽어보는 아버지의 표정에 선전효과를 높이려는 의도가 다분히 배어 있다. [총후병사] 훈련병을 그린 펜화에 담채를 가한 삽화이다. 완전군장으로 간이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 굴과 주먹쥔 손에는 일제침략행위에 동참한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김기창은 해방 후 나름대로 '눈 뜬 장님으로' 친일파가 된 자기 변명과 극복론을 폈다.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환경 지배론과 점진적 식민잔재 극복론이 그것이다. 마치 이것은 요즘 친일파에 대한 비난에 대해 변명해주는 논리와도 같다. '당신은 총칼 앞에서 떳떳할수 있는가?'란 질문과 마 찬가지다. 여기에는 상당한 모순이 담겨있다. 첫째로 총칼앞에서도 대한민국만세를 외친 숱한 순국선열들의 의지를 하찮은 것으 로 여기는 발언이다. 둘째, 김기창 같이 자신의 분야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은 타의귀감이 된다는 것이다. 익히 알려진 얘기지만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나찌 독일하의 프랑스가 해방되자 먼저 반민족행위를 한 자들을 바로 처단했다. 특히 문필가와 예술가의 경우에는 가차없이 처단했는데 그 이유를 말하길 '그들을 살려두면 우리 미래의 예술에 도움이 될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아부하는 예술로 국민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얘기했다. 김기창은 자신의 친일행각에 대해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물론 의지가 강한자기 정신을 소유 한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평범한 인간이면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겠지요'라고 말한바 있다. 이렇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과는 커녕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태도를 보이다 뒤늦게 약간 사죄의 뜻을 보이기도 했다. 어쨌던 김기창 화백은 우리 미술사에 화려한 경력을 남긴 화가임에는 틀림없다. 서정주때와 마찬가지로 이런 사람일수록 사후 비판에 대해서는 추모분위기 일변도가 아닌 엄정한 잣대가 요구된다. 역사의 교훈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 한겨레 신문 칼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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