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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아버지 그리다 이젠 다 자라버렸소(퍼온글)

50년만에 동생만나는 시인 정지용의 아들 정구관'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가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시인 정지용(鄭芝溶)의 아들 구관(求寬ㆍ73)씨는 아버지가 남긴 시 중 요즘에는 이 시가 자주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26일) 오후 서울에서 있을 남북이산가족 3차 상봉에서 동생 구인(求寅ㆍ67)씨를 만난다. 1950년 7월 납북된 아버지를 찾으러 나섰다가 실종된 동생을 5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상봉은 구인씨가 3차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누이의 생사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해서 이뤄지게 됐다. '동생이 내년이면 탄신 100년이 되는 아버님이 살아계실 거라고 생각해서 생사를 확인해달라고 하진 않았을 거야. 구인이도 아버님이 벌써 돌아가셨다는 걸 알고 있을 거야. 북한에서도 아버님이 경기도 소요산 뒤에서 폭격을 맞아 돌아가셨다고 한다잖아.' 그는 동생이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그를 찾으려고 생사확인요청서 맨 위에 아버지 이름을 써 넣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워낙 이름이 나셨으니 내 이름보다는 아버님 이름을 쓰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거야‥. 아버님 이름만으로도 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그의 말대로 그의 삶에는 아버지 정지용의 그림자가 깊고 두껍게 드리워져 있다. 그의 삶은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6ㆍ25가 터진 그 해 7월 어느 날 오후 '문 안에 좀 들어갔다 오마'하고 집을 나간 정지용은 1988년 해금될 때까지 월북시인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집을 나선 후 월북했다는 소문만 나돌았을 뿐 생사조차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그 역시 다른 대부분 월북자 가족과 마찬가지로 괴롭고 힘든 삶에 쫓겨야 했다. '논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주인집에 중학교 국어책이 있었어. 심심해서 뒤적이는데 중간에 한 페이지가 온통 먹물로 까맣게 칠해져 있는 거야. 학생을 불러 '왜 이렇게 책에 먹물을 칠했니'하고 무심코 물었더니 '정지용이 시가 있던 페이지인데 선생님이 빨갱이가 쓴 시는 읽으면 안 된다고 해서 먹물칠을 했다'고 그래. 참 기가 막혀서.' 그 뿐이 아니었다. 버젓한 곳에 취직을 할 수 없어 온갖 일을 다해야 했던 건 물론이고 수시로 당국에 불려갔다. '청주에서 장사를 할 땐데 난데 없이 수사관들이 몰려와 무조건 수갑을 채우더니 경찰서로 끌고 가는 거야. 왜 이러냐고 했더니 다짜고짜 이북에서 보내온 편지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러. 편지는 무슨 편지요, 아버지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편지란 말이요 했더니 사흘을 처박아 놓고 조사를 하는 거야.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국회의원이 북한에 있던 자기 부친으로부터 편지를 받아 보관해놓았던 게 들통이 난 거야. 그러니 나에게도 우리 어른이 편지를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나를 혼 낸 거지. 그 뒤로도 1년에 한 번은 그런 조사를 받은 것 같아.' '하도 시달려서 나중에는 충남 보령으로 내려가 조그만 탄광에서 덕대(광부 우두머리) 노릇을 했어. 세상과 끊고 사니까 당국에서도 찾아오지 않더라고, 그 때가 제일 편했어. 그 때가 편했다는 말,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도 못할 거야.' 더 큰 고통은 인간관계의 단절이었다. '아버지를 따르던 사람들이 많았잖아. 제자도 많고, 문학적인 동료도 엄청 많았지. 그런데 이 분들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하면 누가 있는지 한 번 둘러보고는 마지못해 인사를 받아. 그리고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나를 만났다고 하지는 말라'는 거야. 심지어는 '내가 정지용의 아들입니다'고 그러면 '정지용이가 누구요?'라고 모른 척 했던 아버지 제자도 있었어요. 그 사람들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예전에는 그렇게도 우리 어른을 존경하네, 한국 최고의 시인이네 하던 분들이 그런 말을 하니 내 마음이 어떠했겠어?' 한국 최고의 시인이 아버지였던 그는 아버지의 반대로 문학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야 했다. '집에 책이 많았잖아. 하루는 세익스피어를 읽는데 아버지가 화를 크게 내시면서 못 읽게 하시는 거야. 문학은 배고픈 공부라고 하시는 거야. 문학 대신 의사가 되라고 하시더군. 나도 의사가 될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하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서울 역 앞 세브란스 병원에 있던 친구를 만나고 오신 후 의사도 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 날 병원에서 의대생들이 해부를 하는 걸 보고 오셨는지, 그 끔찍한 짓을 해야 하는 의대에 가느니 다른 걸 하라고 하셔서 상업학교에 들어갔지. 아버지는 그날 병원에 갔다 온 후 일주일을 앓아 누우셨어. 시체를 많이 보셨던 같아. 서정시인이 하루 만에 시체를 많이 보았으니 아파 누우실 만도 하지‥.' 젊어서 문학 책을 보지 못했던 그는 훨씬 나이가 든 후 많은 책을 읽게 된다. '1978년에 문학평론가 백 철(白 鐵ㆍ작고)씨의 자서전을 읽었는데 '정지용이 평양형무소에 갇혀있었다'는 증언이 나오잖아. 월북한 사람이 형무소에 갇혀 있을 리가 없지. 그 증언 자체가 납북됐다는 증거가 아니겠어. 그 동안 월북자 아들로 살아온 것도 억울하고 위대한 시인인 아버님도 공산주의자로 역사에 기록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때부터 전국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숱한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한 거야.' 이 때 찾은 자료를 근거로 그는 정지용이 집을 나서 지금 소공동 롯데백화점 자리의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다가 열차 편으로 평양형무소로 이송됐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 이후 정지용의 행적은 밝혀진 것이 없다. 그는 그러나 그 증언을 했던 사람(계광순ㆍ桂光淳ㆍ전 국회의원ㆍ작고)이 미군의 폭격으로 평양형무소가 파괴되자 탈출한 사실로 미뤄 그때 폭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때 변을 당하신 게 분명해. 기록으로는 생사를 알 수가 없지. 생사람을 막 잡아넣던 그 시절에 무슨 수감자 기록이나 생사확인 기록이 있겠어? 북한에서는 오히려 남쪽에 있는 소요산에서 폭사하셨다는데 왜 우리보고 찾아내라고 하느냐며 뒤집어 씌우지 말라고 하기도 했대.' 정지용은 몇 차례에 걸친 그의 탄원과 여러 문단 인사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1988년 월북시인에서 납북시인으로 해금돼 '최고의 서정시인'이라는 칭호와 함께 다시 문학사의 정면에 나서게 된다. 정지용이 중학교 다닐 때 썼던 시 '향수'도 곡을 얻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리어지게 됐다. 고향인 충북 옥천에서는 해마다 '지용제(芝溶祭)'가 열려 그의 문학을 기리고 있다. 지용제는 미국 LA와 중국 연변의 동포사회에서도 열리곤 했다. 납북된지 38년 만의 일이었다. '호수라는 시 있잖아.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우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밖에'라는 짧은 시 말이야. 아버지가 해금되기 전까지는 여학생 손거울에 시인 이름도 없이 인쇄되어 돌아다녔지. 그게 해금이 되어 학생들이 아버지 이름까지 외우게 되는 걸보니 반가움보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려야 했나라는 생각도 들더군.' 아버지를 찾기 위해 수많은 문학서적을 읽어야 했던 그는 아버지가 문학공부를 시켰더라면 해금이 빨라졌을 거라는 말도 했다. '내가 문학을 몰랐으니 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일찍 찾을 수 없었던 거야. 아버지를 도우려 했던 사람들도 더 일찍 만날 수 있었을 터이고.' 많은 책을 읽은 탓에 우리나라 현대 문학사에 관해서는 웬만큼 알게 됐다는 그는 '그래도 글은 쓸 줄 몰라. 쓰는 건 아무래도 다른 가봐. 한 줄도 써본 게 없어'라고 말했다. '내 아이들도 글 재주는 없어. 2남2녀인데 모두 그래. 그런데 올해 열셋된 외손녀 아이가 곧잘 시를 써, 내가 봐도 그 나이에 쓸 수 없는 걸 쓰고 있어. 아버지 시재가 그 아이에게 나타난 게 아닌가 생각도 하지. 요즘은 그 아이와 함께 아버지 시를 읽는 게 낙이야.' 그는 정지용이 남긴 2남2녀중 맏이다. '4대독자였던 아버지가 자식을 많이 두길 원하셔서 원래는 8남매였는데 살아서 자란 건 4명 뿐이야. 둘째 구익이도 구인이와 함께 아버지를 찾으러 나섰다가 없어졌는데 구인이가 소식을 가지고 올지‥.' '동생과 동생 가족에게 선물을 줘야 하는데 몇 개나 준비해야 하는지, 옷을 사려니 치수도 모르지, 답답한 일이 많아. 그런데 기자 양반, 상봉장에서 기자들이 우리 형제에게 아버지가 납북됐나, 월북됐나 하는 건 안 물어봤으면 좋겠어. 이북에서는 월북이라고 주장한다는데 동생이 내 앞에서 납북이라고 하겠어? 돌아가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는데? 그렇다고 내가 동생 때문에 월북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는 '동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눈물도 하도 흘려 이젠 남아있을 것 같지도 않아'라고 말하더니 결국 한 방울 눈물을 보였다. 아버지의 시 중 생각나는 것 한 수만 외어달라고 했더니 '별똥별을 찾으려 벼르다 벼르다 어느 새 나이만 들었다'는 그 시를 나지막이 읊조렸다. 리듬도 있고, 장단도 있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요즘 들어 그 시가 자꾸 생각난다는 그가 찾으려 했던 별똥별은 무엇이었는지. 동생을 만나면 그걸 찾을 수 있으려는지. 동생 줄 선물을 찾아보아야 겠다며 일어서는 그를 보내면서 떠오른 생각이었다. - 정 숭호,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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