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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퍼온시)

이재성 : 1964년 서울 출생, 국민대 국문과 졸업 바늘을, 한 움큼 삼킨, 목까지 잠기는 시커먼 스모그의 급류 속으로 나는 떠내려 간다. 허위적거리며, 산발한 물귀신의 머리카락에 발목을 잡힌 채, 납빛 가면을 쓴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본다. 나는 세상을 사랑한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아니야, 물소리야. 저기 사람이 떠내려가는데? 아니야, 나무토막이야. 그런가? 정말, 그런데! 닿는 곳이 어디인가. 세상에서 그렇게 잊혀져 간 사람들. 강의 하구 부드러운 모래섬에서, 봄날 죽었던 가지에서 다시 피어나는 잎새처럼, 꽃잎처럼   서해안 개펄같이 질퍽한 시장바닥을, 다리가 퇴화한 파충류처럼 얇은 뱃가죽을 문지르며 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어디서 잃었을까? 이데올로기 전쟁의 피냄새를 맡은 상어의 이빨이 물어뜯었을까? 공사판에서 질통을 지고 오르다 아찔한 현기증에 실족을 했을까? 그러나, 그의 하체에는 생명만큼 질긴 고무타이어가 새살로 돋았다. 무좀 방지 구두 깔창과 양말을 유모차에 가득 싣고, 온몸으로 밀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창으로 찔리듯, 매미의 호각소리에 맞추어 내려꽂히는 삼복더위의 뜨거운 햇살에 등을 마구 찍히며, 저 세상으로 가는 4호선 지하철역 입구, 비닐하우스에서 속성으로 재배된 꽃 옆에서 점자책 가사를 더듬으며 늙은 스피커통으로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의 목 위에는 철셔터문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위태롭게 걸려 있고, 사람들은 세상의 오자 투성이의 점자책을 더듬으며, 시간의 단두대 밑을 오고간다.   오늘 아침 여기서 끔찍한 교통사고가 났었다. 신호등의 파란 불만 보고 건너던 임산부가 트럭의 바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름도 얻지 못하고 죽은 어린 영혼의 무덤은 어디인가. 마구 물어뜯을 사람들의 목덜미를 겨냥하며 술취한 미친 개떼들이 질주한다. 깨진 빗살무늬토기같이 생긴 횡단보도를 목숨걸고 건넌다. 인신매매 당한 어린 소녀들의 피를 빨아먹은, 유흥가의 네온사인의 혈관 속으로 붉은 피고름이 흐른다. 음란한 눈을 깜짝거리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환락의 진공청소기 속으로 빨려들어간 사람들은 '나'를 잊어버린다.   어두운 저편에서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저편으로 사라지는 회전문, 문이 돌고 돌아 환히 열린 세상은 언제인가. 언제 튕겨져 나와야 볼 수 있는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원심분리기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가죽과 살이 해체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뻐근한 고개를 쉬지 않고 돌리며 감시하는 선풍기의 눈 밑에서,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면,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면, 나는 이번 정거장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 내일 아침 마당에서 가슴의 나무에 핀 사람의 숲을 볼 수 있으리. -1991 년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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