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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오늘, 잊혀지지 않은 추억

1966 년 3 월 11 일해마다 이 날은 잊혀지지 않는다아니 영영이 잊혀지지 않은 날일거다.그날은 ....척박하고 내일이 없어 보이는 농촌을 떠나서 내 마음의 꿈을 성장하고 연분홍빛의 무지개를 펼치기 위해서 과감히(이런 말이 맞겠지 부모님의 반대로 그렇게 결행했으니깐........)내가 살던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아니 신앙촌에 입성한 날이다.입성( 入 城 )?내가 어디 전쟁에서 적군들을 격파하고 승자가 되어서 개선문을 통하여 들어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입성은 입성이다...전날 늦게 완행열차를 타고 장자동 이모부는 대전에서 경상도로 돈벌러 나가고 나와 경제는 그렇게 말없이 영등포에 내렸다..그러고 보니 나완경제는 바로 입성동기가 되는 셈이다...둘이는 그 이모할머니가 애기 한데로 그런곳에서 신앙인으로 살면서 더 나은 희망을 꿈꾸기 위하여 가는 것이었다...채 어둠이 밝기도 전인 영등포 역사...시름시름히 눈을 차 안에서 붙였지만 어딘가 잠이 못자란 우린 영등포에 도착했단 방송을듣고 내렸다.개나리 봇짐...그 시절은 바로 먹는단 것이 지상명제였고 그래서 우린 두말의 쌀을 배낭에 넣고서 거기에 하차...그때의 내 행색은 어떠했을가?그때의 그 모습을 사진이나 한장 찍을걸...준자가 알려준대로 영등포에서 신앙촌가는 버스는 많았다.날이 발기도 전에 버스는 경인가도를 잘도 달렸다.창밖은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채 신앙촌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쌀쌀한 기온을 느끼며 우린 신앙촌이란 간판이 보이고 신앙촌 물품을 파는 곳에 내렸다.그 주위는 훤하게 트인 대형 매점이 자리잡고 있었다.영등포에서 한 40 분이나 걸렸을가?경재와 난 쌀 두말을 짊어지고 신앙촌으로 들어섰다.한참을 들어서니 저기 산위에 걸려있는 찬란히 빛나는 오만제단의 그 불빛...그리고 은은히 울려퍼지는 찬송가의 울림들...- 야 여기가 바로 신앙촌이다 내 이상향이 여기다..난 여기서 성공할거다아니 신앙인으로 거듭태어나자....감은 좋았다 아니 에감은 좋았다 여기가 바로 물건을 살때 주인없는 상점을 운영한다는 선남 선녀가 산다는 신앙촌이다...그 초라한 행색은 생각도 않고서 우린 신앙촌 안내 사무소에 들렸다.- CHRISTAN TOWN GUIDE OFFICE -그 사무실엔 직원이 정중히 그리고 자세히 지도를 보여주면서 할머기가 사는 시디 11동을 가르쳐 준다.죽다가 왼편에 보면 바로 에덴사진관이 있어요..그 편으로 내려가면 바로 시디11동이 보입니다....말도 행동도 그렇게 정중히 보일수 없었다..마치도 하느님의 사업을 하는 그곳의 얼굴이기라도 한것 처럼.....가서보니 이건 상상한 것보다도 초라하고 좁은 집이다들어서자 바로 부억이 있고 그리고 안방이고 건너방...그래도 이런 도시형의 집이 내가 살던 농촌과는 비교가 안되던 그런 집이다...몇달전에 와있던 진옥이....떨떠를하게 쳐다보면서 인사한다.이 좁은 집에 왜 왔냐는 그런 표정이다..할머니가 해준 아침밥...그리고 ZION 간장...당시는 맨밥에 그 시온간장을 그냥 비벼 먹어도 밥은 꿀맛이었다...경재와 난 눈깜작할 사이에 개눈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더 먹고 싶었는데 밥이 모자란가 보다...이렇게 우린 신앙촌에 입성하고 새로운 곳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그리고 내가 군입대하기 까지 2 년동안이나 난 여기서 굴곡많은 신앙촌생활을 했었다...그 2 년간 머문곳이 바로 신앙촌...왜 그렇게도 잊혀지지 않는 곳으로 자리잡고 그럴가?내 인생에서 중요한 위치가 된 곳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한참이나 감수성이 에민한곳에서 고생한 탓이었을가?지금 생각해도 그 곳 신앙촌이 편안한 곳은 아니었어도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어떤 보다 굳건한 결심을 해주게 한것만은 틀림없다...그래서 잊지 못할거다..1966 년도 3 월 11 일...새벽에 신앙촌 입성하던 날....거기서 부터 내 인생은 새롭게 펼쳐진것은 아니었을가.....??담에 더 이야기 하자 신앙촌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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