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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만난다는 것...

성북동 정순누나집에서 모임이 있었다.참 성북동------오랜만에 가 보는 곳이다.그래도 총각시절에 적어도 한달에 한 두번은 방문했던 사촌누나네 집..그러나 이젠 나이탓일가?일년에 한번 가기도 어렵다.나이가 더 들수록 더 자주만나고 자주 가고 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된다아니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그 정순누나는 왜 날 그렇게도 좋은 감정으로 보는 것인가?- 너는 생전가야 네 집사람하고 쌈은 안하지?- 넌 그렇게 재밌게 말을 해서 집에서도 재밌게 살거야...그리고 네가 뭐가 부족하다고 영란이 엄마하고 쌈을 할거냐...?- 참 누나도 아니 살면서 쌈하지 않는 사람이 어딨어요?쌈하지 않고 산단 사람은 어딘가 바보던가 아니면 개성이 없는 사람들이지 그리고 부부간에 쌈도 하면서 살아야 새론 기분으로 정도 들곤 한답니다..나요? 자주 싸워요..다만 폭력을 쓴다거나 물건을 부셔버린다 거나 하는짓을 않하죠...말로 쌈은 자주 한답니다 ....정순누나...총각시절에 날 중매하고 그녀와 은근히 결혼성사시킬 려고 노력도 했지만 왠지 그렇게 맘에 안들었었다.얌전하고 얼굴도 전형적인 미인 타입이긴 했지만 그 뭐랄가?그 활달하달가...성격이 밝아 보이지 않아서 였을거다..그런 활달하고 명랑한 여성을 난 좋아했다 그런탓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지만 이여잔 넘도 명랑해서 탈이긴 해도 당시는 참 명랑하고 쾌할한 여잘난 선호했었다..아마도 내가 조용하고 그런 성격탓 땜이었나 보다.....몇번의 데이트하곤 그대로 헤어지고 말았다...성북동...한성대학교 전철역에서 하차하여 버슬타라고 한걸 난 천천히 걸었다.오늘도 날씨는 바람이 불어 쌀쌀했다...천천히 걸어서 10 분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누나네 집...에전의 그 거리와 아직도 한옥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는 엣날의 집들전통한옥이 아니라 한때의 유행했던 마당이 없던 그런 서민주택인 한옥이젠 어딜가도 이런 한옥을 보기가 힘들다..아니 모두가 양옥단층이던가 아님 다세대 주택으로 탈바꿈하였지...다만....삼선동 로터리에서 오르는 길의 오른쪽이 냄새나는 개천이 복개되고 그 위에 상가가 조성되어서 달라진것 같아도 그 거리는 그대로다...이런 길이 좋다...아주 오랜 추억을 회상하면서 걸을수 있는 거리가...몇년만에 와서 보면 그 거리가 어디였던가 하고 어리둥절한 곳보담은 그래도 에전의 그런 거리가 생각나는 거리가 좋다..그런 거리는 바로 엣날을 회상하고 지난 추억을 되살리면서 걸을수 있기 땜이다..그 삼선동 로터리에 있던 아담다방.....지금도 그대로 이층건물로 남아있구나 이름만 바뀐 그 다방자리...거기서 만나곤 했었지...시골서 올라오신 홍래형님의 전화가 몇번이나 왔었다...빨리 모이잔 애기..얼른 만나고 내려 가야 한다는 그 형님..성격이 급한것 만치나 바쁘게 서둘러 매사를 실수를 하곤 하여도 그래도 성격이 순수하고 좋은 분이다...그래도 우리 가문에서 마지막 보루로 시골에서 대소사를 챙겨주시는 형님이 그래도 시골에 계신단 사실이 든든하다...수원의 형님도 아침에 감기 몸살로 참석을 못한단 애기였다..그래도 일년에 이렇게 한두번 만난단 사실이 산단 의미가 아니고 뭔가?아무리 친척이라고 해도 만나지 않음 이건 이웃 사촌만도 못한 법이다조부님 비를 세우곤 그 흥래형님은 여기에 모이지도 않는다..뭐가 그리도 섭섭한지 그렇게 산다..음력 3 월 10 일날 하향하란 애기다..간다고 했다.그러니까 아버지 형제들이 모여서 모신 제사가 있단다 금성산아래에 태평사 가는 곳에 있는 선산이다..이번에 가야 한다.지난번 고모님 상당했을때 그 창래 형님이 오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아버님 생시엔 그런 대소사의 제사는 아버님이 알아서 하셨지만 이젠 내가 대소사에 참석하여야 하는 위치가 아닌가?형님이 할일이 있고 내가 할일이 있으니 .....서울에 산단 이유 만으로 참석을 하지 않으면 안된단 그때의 창래형님..사람들은....나이가 들면 고향과 선산과 그리고 조상을 되돌아 본다고 한다..자연속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것인가 아님 자연에의 회귀 본능같은 것인가.....같은 의미 일거다.그날 참석하고 아버님 비세운단 것도 상의하고 그럴거다.그 형님은 6 월경에 하잔애기다.비문도 자꾸 고전적으로 어디서 한문을 잘 아는 분에게서 받아서 써야 한단 애기지만 어디 아버지의 비문을 꼭 그렇게 거창하게 한문일색으로 써서 만든단 것이 무슨 그렇게 대단한의미가 있단 말인가?아버지가 거창한 벼슬도 한분이 아닌데 .....그 비문은 누가 봐도알수있게 난 한글로 새길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 비문을 나중에후손이 누구나 읽고 알수 있게 쉬운 한글로 새긴다고..큰아버지는 하건 말건 난 한글로 새겨 둘거다..한문....과연 그런어려운 한문을 배우고 남의 비문을 가서 어렵게 해석하여 읽을수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것인가?그 한문의 비중이 점점이나 적어지는 추세에...그런 전통적인 사고에 젖어있는 형님은 꼭 비문은 그렇게 어려운 한자로 새겨두어야 권위가 있고 보람으로 아는가 보다...내가 작성하고 내가 만들어 새겨달라 할거다..그것이 바로 내가 시골에 가야 하는 가장큰 이유이기도 하다어머님이 그래도 생존시에 아버지의 선산에 비라도 하나 새겨 두는것이당신은 바로 평생에 보람으로 알고 있질 않은가?그래서 어머님은 외할아버지의 묘도 그렇게 비를 세우고 그러셨다...당신이 주도해서 그렇게 당신이 여기에 존재함을 나타내시었다.딸만 있는 외할아버지도 외롭지 않게 그렇게 몇년전에 만드셨다..이젠 아버지의 묘비만 만들면 당신은 할일이 다 했단 애기란다...기왕이면 어머님 생존시에 만들어 모셔야 그래도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바라보시는 당신도 그렇게 마음이 흡족하실거고....그리고 우리들도 어떤 작은 보람된 일을 했다는 어떤 긍지도 들고....그나 저나 그 비를 세운단것이 어디 한두푼이 드는 일이어야 말이지...서울역까지 그 형님과 같이 택시타고 왔다.일요일이라 삼청고개를 넘으니 금방 경복궁길에 닿은다...이 길로 가면 금방에 성북동에 가는 길이다..이런 샛길도 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데.....이젠 형님도 늙으셨다,,총총히 사라지는 형님의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한사코 손을젓는 형님의 호주머니에 가시면서 맥주 사 잡수라고 드렸다..단 몇만원의 돈이라고 해도 그래도 누가 용돈한푼 드리지 않은것 같았다..찬면이가 얼마간 주었나?여유있음 양복이나 한벌 해드렸음 좋겠단 생각을 했다 어쩐지 그 옷이 촌스러워 보인 유행도 한참이나 지난 옷같이 보여서 .....만리동 고개를 천천히 걸어서 충정로역까지 걸었다...만리동 고개도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그대로다...서울도 그렇게 하루가 변화한곳이 있고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그래도 엣 모습으로 남아있는곳이 아직도 도처에 많다...그러나 이곳도 언젠가는 상전벽해로 변화하고 말거다.그 변화가 ...바로 번영의 상징으로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전의 사람들은 추억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든지도 모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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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882 사랑과 고독, 그리고... 6956 독백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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