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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보리밥 한공기에 추억을 씹으며(퍼온글)

나는 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면 시장어귀에 삐뚜름하게 걸린 간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한다. 투박하면서도 훈훈한 정감이 가는 글씨체로, 정겨운 시골 고향집을 연상시키는 보리밥집이다. 그 앞에서 옛생각에 젖어 들다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종종 보리밥집으로 들어가 보리밥 한 공기를 이른 저녁으로 깨끗이 비우고 나온다. 기실 내가 채운 것은 음식에 대한 공복감이 아니라 추억에 대한 허기일 것이다. 어릴 때는 보리밥을 먹기가 지겨웠다. 보리밥처럼 거무튀튀한 된장국 냄새에도 진절머리가 나서 매일 어머니께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보리는 언제나 '가난한' 식물이었지만 겨울을 희망으로 견디게 하는 작물이었다. 창고에 저장해 둔 감자나 고구마마저 다 떨어져갈 무렵 사람들은 패기 시작한 보리싹으로 춘궁기를 버텨갔다. 그러다가 견딜 수 없으면 보드라운 보리잎을 따서 보리국을 끓여 먹기도 했고, 어린 보리싹으로 보리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소위 '보릿고개'라는 것이다. 나와 비슷한 세대로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그런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다시 많은 사람들이 보리밥을 찾는다. 세상이 풍요로워지면서 사람들이 건강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어릴 때부터 값비싼 보약을 먹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보리에 얽힌 그런 궁색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보리밭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세상이 전부 갈색으로 메말라 있거나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는 겨울날,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는 푸른 보리밭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또 모든 식물에 물이 올라 세상이 파릇파릇해질 무렵에 황금색으로 너울거리는 보리밭 풍경도 대단했다. 며칠을 연거푸 시장 안 보리밥 식당에서 보리밥을 먹다가 얼마전 그 시절 그 보리밭을 보고 싶어 교외로 나갔다. 유년의 추억이 깃든 보금자리였던 곳, 여물어가는 보릿대를 꺾어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고, 보리 깜부기로 콧수염을 그리며 키득거렸던 일을 떠올리며 차를 몰았다. 보릿대처럼 거칠었던 아버지 어머니의 손마디, 보리떡을 놓고 다투던 동생들의 모습도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아무리 가도 보리밭은 나타나지 않았다. 벼 밑동만 남은 텅빈 논만이어졌다. 생산이 줄어드는 보리와 함께 우리의 추억도 하나 둘 사라져가는가 보다. 김영련·부산 동래구 반여동 ( 한국일보에서 옮긴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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