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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는 왜 들추지( 퍼온글 )

언론개혁을 둘러싼 시비가 뜨겁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하다. “개혁 논의가 미래 지향적이지 않아. 는 도대체 왜, 이 시점에서 과거 들추기에 바쁘지?” 과거를 곱씹는 일이 과연 무의미한 작업일까. 잠시 일제 막바지로 돌아가 `민족지'들을 읽어보자. 조선 젊은이들을 총알받이로 몰아넣은 지원병제도는 `조선 민중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담시키는 미나미 총독의 영단'이었다. 일왕 히로히토는 `조선의 어버이'였고, 일장기는 신문의 제호 위에 모시지 않으면 안되는 `조국의 상징'이었다. 항일 무장 투쟁 유격대는 `인명을 마구 살상하고 돈을 뜯는 폭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먼 옛날의 얘기다. 그 구절들을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다. 그러나 어쩌랴. 그 편집 정신이, 그 어법이 몇십년의 시차를 두고 그대로 되살아남을. 박정희 독재의 절정을 알리는 `10월 유신'은 `가장 적절한, 가장 알맞은 조처'였다. 온 국민에게 죽음의 침묵을 강요한 비상사태는 `민주주의의 향상과 발전을 위한 하나의 탈각이요 시련이요 진보의 표현'이었다. 목숨을 걸고 군부독재의 재집권 움직임에 저항한 80년 광주시민은 어김없이 `총을 든 난동자요 폭도'였다. 그 학살극의 주인공 전두환은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인물'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였다. 광주의 피비린내가 아직 가시기도 전이었다. 박정희는 저승길을 떠난 지 오래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도 역사의 도도한 물결 위에서 지난날 한때의 영화를 쓸쓸히 회상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을 칭송하던 날카로운 필봉은 어느새 그들을 무참히 단죄했다. 그 `민족언론들'은 적어도 오늘은 독재자나 일제를 찬양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제 자유언론의 기수임을 자랑한다. `할 말을 하는 신문'은 이제 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아니다. 면면히 흘러온 전통과 정신이 한 순간에 표변할 수는 없다. 아무런 고뇌도, 속죄의 의식도 없이,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한강 물길이 어느날 갑자기 저절로 역류하는 일이 가능할까. 또다른 우상이 그들을 유혹하지는 않을까. 자본과의 밀월, 권언유착의 단꿈에서 그들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들의 과거를 단죄하는 뜻이다. 또 하나의 시비는 시장경제 논리를 앞세워 제기된다. “신문은 저마다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웬 시비냐. 진보를 표방하든,수구 기득권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든, 독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판단할 일을 왜 너희들이 나서느냐”.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장논리는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전제로 한다. 정글의 법칙이 곧 시장의 논리는 아니다. 개인의 무한 자유가 허용되지 않듯, 자본의 자유도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시장의 근본정신이다. 언론이 시장의 논리 앞에서 겸허해질 이유가 또 있다. 오늘 거대 언론권력이 축적한 자본이 순수한 땀과 노력의 결정체인가? 언론자본 성장의 역사는 말한다. 시장경제의 규칙은 적어도 언론시장에서는 거의 작동되지 않았다고. 경영난을 이유로 문을 닫은 신문사의 사례가 거의 없었다. 언론은 자본의 이득보다는 정치적 이득을 위해 창간 운영됐다. 신문자본의 비약적인 발전 뒤에는 독재권력의 비호가 있었다. 반민족-반민주-반민중은 언론권력의 어머니였다. 그러기에 `안티조선운동'은 언론사적 의미를 갖는 중대한 사건이다. 언론권력의 독재에 대한 독자들의 치열한 저항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는 거짓에 대한 거부운동이다. 또한 훼손된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몸부림이요, `민족지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뒤늦은 깨달음이다. 일제를 찬미하는 소리는 `힘 앞에 굴복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독재찬양의 노래는 `총칼 앞에서는 비굴한 생존의 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교훈이었다. '양심을 좇으려다 고난을 자초하느니, 배부른 돼지가 돼라.' 거짓의 과거 청산 없이 `할말을 하는 신문'은 없다. 고영재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 한겨레 신문칼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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