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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아버지( 퍼온글 )

“아버지, 돌아가셨다. 내려와라.” 올 것이 왔기 때문일까 의외로 착 가라앉은 어머니의 목소리는 딸깍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대신 보름 전 힘없지만 간절히 나의 이름을 부르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헨숙아, 저 시루떡 참 맛있겠다.” 아버지의 손길을 따라 떡 좌판을 향하던 나의 눈은 흰 와이셔츠 속의 앙상한 아버지의 팔에서 멈췄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팔은 굉장히 크고 무섭게 느껴졌다. 방과 후 아이들과 놀다 조금만 늦게 집에 들어오면 그 큰 팔이 영락없이 나의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갔다. 계집애가 일 안 하려고 늦게 들어온다는 꾸중과 함께. 순전히 가족 노동력에 의지해 양계장을 꾸려 나갔던 우리 집은 1년 365일 내내 한가로운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등교시간보다 훨씬 이른 새벽에 일어나 닭 모이와 물을 주고, 학교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노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곧바로 집에 돌아와 계란을 거두고 다시 저녁 모이와 물을 주어야 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면 흔들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 말리려고 늘어놓은 나락을 쓸어모아 물받이를 통해 마당으로 내려보냈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닭똥을 친다든가 논에 나가 농약을 치고 피를 뽑았다. 이 모든 일을 지시한 사람은 아버지였고, 그래서 나는 죽어라 일만 시키는 아버지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진주로 간 것도 명분은 공부였지만 사실은 일과 아버지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도망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주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 자유로운 생활에 나는 신바람이 났다. 그 지긋지긋한 일을 안 해도 되고 나만 보면 일하라고 다그치는 아버지도 없고. 얼마나 좋았는지 진주에 온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 다녀온 친구가 너네 아버지가 주말마다 너 좋아하는 딸기 사 놓고 기다린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 다음 주말 덜컹거리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버지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헨숙이 왔나?” 그 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딸기를 성에 차도록 먹었다. 그날 이후 어려서부터 쌓였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조금씩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나에게서 아버지는 날 낳아 주신 그냥 그런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비록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고된 노동과 독한 술과 줄담배로 건강을 잃고 몸져누우신 말년의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아버지의 삶을 내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사랑을 표현할 물질적 여유도 없었고 세련된 방법도 몰랐다”고. 그래서였을까, 별로 남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지난 일들이 아버지의 살아생전 모습과 함께 이따금 진한 그리움으로 다가오곤 한다. 그리고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나 자신에게서 아버지의 흔적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아마 이제야 조금씩 철이 드는가 보다. 올해에는 꼭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버지의 무덤가에 예쁜 꽃을 선물해야겠다. 문현숙/출판편집인 ( 한겨레 신문칼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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