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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의 파시즘(퍼온글)

진지한 독서 행위가 일반적이었던 지난 1980년대에 견주어서 요즈음의 책 시장의 형편을 보면, 슬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영상 매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만큼, 책의 수요가 줄어든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독서 문화의 질적 수준이 현저하게 낮아졌다는 것이 문제이다. 독자들은 주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것만 선호하고, 다른 것들은 철저히 외면하는데, 베스트셀러란 더러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개는 통속적 흥미를 유발하는 급수 낮은 것들이 아닌가. 이러한 현상은 영상 매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시청자·관객의 시선은 한두 개의 베스트셀러에만 집중되기 일쑤이다. 그러니까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품질이 별로 좋지 못한 똑같은 책, 똑같은 영상을 보고 있는 셈인데, 그것은 결국 똑같은 사고를 낳음은 의미할 것이다. 집단 사고의 획일화 현상이다. 베스트셀러는 경박한 부화뇌동 현상에 의해 만들어지는 일이 적지 않는데, 그러한 경우에 사고를 결정하는 주체는 작가, 아니 그 배후에 있는 광고주 한 개인이고, 독자는 단지 그 사고의 반사체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시즘은 그러한 독자의 의식 바탕에서 자란다. 놀라운 판매 부수를 기록하고 있는 장기 베스트셀러로서 로마 시대를 소재로 한 이야기 책이 있는데, 그 내용 자체가 파시즘의 성격이 짙다. 로마의 영광을 되찾자는 것이 바로 무솔리니의 슬로건이었거니와, 이 책은 무솔리니가 닮고자 했던 쥴리어스 시저를 매우 매혹적인 카리스마로 묘사하는 등 호전적이고 권모술수·군사전략에 능한 냉혈의 파시스트들을 `영웅'으로 예찬하고 있다. 말하자면 선악의 구별은 싸움의 승패에 달려있고 이긴 자만이 정의롭다는 것인데, 많은 독자들이 그러한 메시지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예삿일이 아니다. (그러면, 한국의 장군들도 쿠데타와 공포정치로 국민을 이겼으므로 정의로운 자들인가.) 일본 출생의 이 책은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었지만, 한국의 독자들처럼 그렇게 큰 관심을 보인 예는 없다. 파시즘을 용납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러한 독서 현상은 무엇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일까? 죽은 박정희가 되살아나고 있는 요즈음의 희한한 현상도 아마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30년 가까이 군부의 지배를 받아 파시즘에 익숙한 우리인데, 왜 그렇지 않겠는가. 건달의 냉혹한 세계를 그린 영화 가 대히트를 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러한 기질이 아직도 우리 마음에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껏 과거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0년 가까운 군부 독재의 어두운 과거, 개탄스럽게도 그것이 청산되기는커녕, 제대로 비판되어진 적도 없다. 군부 파시즘에 영합했던 언론들이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의 과오를 정당화하려고 혈안인데, 심지어 어느 신문은 장기 기획물을 통해 박정희 부활운동을 꾀하기도 하는 세상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적과 동침'함으로써 개혁을 포기한 현정권의 과오가 크다. 이렇게 파시즘의 지난 세월을 반성·비판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함으로 해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박정희가 옳은지 그른지,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가치관의 혼란에 빠져 버린 것이다. 최근 악화된 경제 상황 속에서 찌들대로 찌든 서민들 중에도, 좋았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구관이 명관이라고 박정희를 추어올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고도성장의 결과가 곧 지금의 경제 불황임을 까맣게 잊은 채. 그러나 우리는 장군의 만년 졸병으로서, 자신의 사고·행동이 오직 장군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던 그 어두운 시절을 그리워할 수는 없다. 일본인들은 `한국'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다카기 마사오라는 일본 관동군 출신 독재자 박정희라고 하는데, 그의 기념관을 국민의 혈세로 건립함으로써 전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일을 꼭 해야 하는가? 현기영/소설가·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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