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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는 허풍?( 퍼온글 )

올더스 헉슬리가 반유토피아 소설로 일컬어지는 에서 예상한 미래는 실로 끔찍하다. 과학이 발달할 대로 발달한 미래의 세계국가인 신세계에서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일체의 개인적인 사상은 정체된다. 생리조차 규격화되어 사람도 정자와 난자를 인공적으로 배합·조작해 획일적으로 대량 생산한다. 모든 인간은 철저하게 알파, 베타, 감마 등의 계급으로 나누어지고 성격도 각각 계급과 직업에 알맞게 만들어져, 생리적으로 아예 계급간의 혼동이나 분쟁이 있을 수 없는 세상이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의 대사에서 따온 `멋진 신세계'는 물론 역설이지만, 이 소설은 극단적인 과학의 발달로 올지도 모를 신세계와 1차대전 이전의 도덕적 구세계를 비교하며 과연 어느 쪽에 인류의 행복이 있는가 묻고 있다. 이 소설이 나온 지 80년이 가깝지만 다행히 헉슬리가 걱정한 신세계는 오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안심한다. 과연 그럴까. 물론 소설을 곧이곧대로 읽으면 그렇다. 하지만 나는 최근 어쩐지 이 소설을 은유로 읽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헉슬리도 소설에 그린 그대로의 미래를 예상한 것이 아니라 은유로서 그런 상황을 그려 보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헉슬리가 예견한 “멋진 신세계”에 이미 우리가 들어와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허풍일까. `멋진 신세계'의 가장 강력한 장치는 누구도 개인적으로 생각하게 놓아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이 시키는 대로 하고 남을 따라 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니까 꿈도 없고 고뇌도 없다. 생각하지 않으니까 행·불행의 개념도 없다. 결국 오늘의 우리들의 삶, 정보와 과학과 돈의 노예가 되어 아무런 주체적 생각 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오늘 우리들 삶의 과장되고 변형된 모습을 우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찾을 수 있을 터다. 요즘 시중에 유행하는 말이 “열 살만 더 젊었어도 이민 가지 이렇게 안 살아”이다. 다들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소리다. 정치적 혼란, 경제적 어려움, 빈부의 심한 격차, 아이들 교육에 대한 불안 등 불행감의 원인은 많다. 하지만 나는 이 불행감의 상당 부분이 우리가 생각하면서 살 수 없는 데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거의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산다. 남이 하면 따라 하고 남이 좋다면 좋다고 박수 친다. 한때는 우리의 대표적인 민족성이 은근과 끈기로 표현되기도 했었다. 한데 이것이 산업화와 정보화의 급류 속에서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조급증과 경망함으로 바뀌었다. 우리 민족성을 나타내는 두 부사 “빨리 빨리”와 “대충 대충”은 이제 외국까지도 널리 소문나 있는 형편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신 너무 쉽게 남을 따르고 흉내를 내는 데서 만들어진 성격이다. 개인의 비밀이 거의 보장되지 않는 정보화시대 남과 똑같이 먹고 입고 행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라 하지만, 종교적 전통과 문화적 기반이 약해서인지 우리는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 스스로 불행하다는 생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삶을 회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한데 이점 우리 사회는 너무 인색하다. 공원에 가도 교외나 강에 나가도 먹고 마시고 뛸 공간뿐이지, 조용히 앉아 생각할 공간이 없다. 가령 한강 둔치에는 스포츠 시설은 제법 있는 것 같은데 조용히 앉아 쉴 나무 그늘 하나가 제대로 없다. 생각하지 않는 삶이 만들어 놓은 천박한 문화는 다시 생각하지 않는 천박한 삶을 재생산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 때 헉슬리가 우려한 `멋진 신세계'는 이번에는 은유로서가 아니라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신경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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