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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가자, 시장속으로( 퍼온글 )

영화 의 순이익이 230억원으로 기대된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민심'이란 과연 무엇일까? 영화·방송·출판·광고 등 대중문화 종사자들은 민심을 꿰뚫어 성공을 거두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피와 땀'이라는 말을 써도 좋을 정도로 그들의 노력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사전 시장 조사는 기본이고 완성품을 내놓기 전에 좀더 민심을 파고 들 수 있게끔 뜯어 고치는 일을 수없이 반복한다. 그렇게 애를 써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만큼 민심을 꿰뚫어 본다는 게 어렵다는 게 아닐까. 반면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공적 가치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민심에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당위와 명분을 앞세우며 민심을 향해 훈계를 한다. 그러한 훈계마저도 민심을 꿰뚫어 보면서 먹혀 들게끔 고민을 하면 좋겠건만 그들은 그런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민심에 영합'하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개혁'과 `진보'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추상적인 담론의 차원에선 `민중'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민심이 헤엄치는 시장에 대해 적대적이다. `시장 논리'는 그들에게 악에 가까운 것이다. 그들은 시장에서 시장 논리로 싸워볼 만한 일도 서둘러 포기하여 모든 시장을 기득권 보호와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헌납한다. 민심은 이중적이다. 민심은 퇴행적인 패거리 의식에 열광하기도 하지만 그것에 대해 비판적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부정적인 민심을 이용하려는 시도는 과잉인 반면 긍정적인 민심을 이용하려는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개혁'과 `진보'를 표방한 사람들이 시장을 직접 상대하는 걸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득권 보호와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삼는 거대 매체를 이용해 `개혁'과 `진보'의 냄새를 피우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엔 열성인 반면, 거대 매체를 뛰어넘어 시장을 직접 상대하겠다는 사람들의 시도에 대해선 대단히 냉소적이다. 한때 `좌파 상업주의'라는 욕이 있었다. 이 욕엔 정당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좌파적 가치를 시장 논리에 의해 판매하는 것 자체에 대한 적대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좀더 세심한 질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 말이다. 나는 `개혁'과 `진보' 자체를 주력 상품으로 내세우는 상업주의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선 그런 상업주의를 구경하기가 매우 어렵다. 상업주의 자체를 무조건 혐오하는 문화 때문이다. 상도덕이 전혀 없는 파렴치한 상술마저도 상업주의라는 이름으로 욕함으로써 시장을 직접 상대하는 일체의 행위를 불온시한다. 그리하여 `개혁'과 `진보'를 표방해 도덕적 권위는 누리려 들면서 개혁 대상인 거대 매체들과의 평화공존을 취해 이들을 이용하겠다는 `간접 상업주의' 또는 `기생 상업주의'만이 판을 치고 있다. 한국엔 왕성하게 현실 참여를 하는 교수들이 많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에 이는 축복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현실 참여를 열심히 하는 교수들마저도 '대중적 글쓰기'는 혐오한다. 신문에 칼럼을 쓰는 정도가 상한선이다. 아예 처음부터 작심하고 대중적인 책을 쓰는 건 천박하다고 욕을 먹는다. 그들은 추상적인 이론으로만 민중을 사랑할 뿐 시장을 통해 민중을 직접 만나는 건 매우 상스러운 짓이라고 보는 것이다. 시장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개혁적·진보적 메시지를 전파하고 싶은 사람들이 과감히 시장에 직접 뛰어 들어 치열하게 싸우는 건 타락인가? 아니면 개혁적·진보적 메시지는 절대 시장에서 승리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시대의 민심은 퇴행의 함정에 빠져 있는가? 언론개혁을 위한 노력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고민을 반드시 수반해야 할 것이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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