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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내 생애 힘들었던 날들

지금 껏 살아오면서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그땐 언제였을가?아마도 춘천에서 생활했던 그 몇 개월의 기간였을거 같다.그 한여름을 춘천에서 다 보냈던 시절.그 방황과 내일의 어떤 ㅡ희망도 보이지 않았던 시절.방황과 혼돈의 계절였던 춘천 생활.사실이지 ,고등학교 졸업할때 까진 농촌의 내 고향을 떠난 본적이 없다.가난했지만,워낙 부지런 하시고 어떤 정도의 틀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사셨던 우리 부모님.그 안에서 편안히 살아왔다고 할수 있다.어떤 고뇌니 어떤 힘든것도 그 안에서 이루어 졌고........씨앗을 뿌리면 그 씨앗이 그대로 결실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나온다는 신념으로 사셨던 부모님였다.일본에서 사셔서 세상의 현대 문물을 누구 보담도 더 빨리 접했었고매사는 고집이기 보다는 요령이 더 빨리 그 목적지에 도달할수 있단 것을 어느 정도는 아셨을 텐데도 당신들은 그렇게 원칙이 아니면할려고 하지 않으셨다.내가 보기엔 그런 답답한 성격이 불만였기도 했고, 요령이란 손톱 만큼도없으셨던 우리 부모님.농촌에서 일을 할때도 당신들의 눈에 들지 않음 그 자리에서 혼이 났다그건 ,어쩜 어머님 보다도 아버지가 더 심한 정도였을거다.- 이놈아,저걸 일이라고 해 놓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하심서 지르시던 그 호령.....그런 아버지가 무서웠다.늘 아버진 나완 먼 거리에서 존재하고 있는 분이셨다.- 난 절대로 나중에 결혼하면 자식과의 거리감을 두지 않으리라...마치 친구처럼 소곤대며 살리라.그런 생각을 늘 가졌고 그런 사고 탓인지 우리 애들은 너무도 버릇이 없다.- 아빠가 퇴근하고 들어와서 일어서서 인사 하는 법이 없고..- 존대말은 아예 가뭄에 콩 나듯이 하는 정도.........이런 무례는 어쩜 내가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신앙촌의 몇 개월의 생활이 애당초의 그런 꿈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 생활의 연속임을 감지하였던 나.- 내가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들어온 것인데 이건 아니잖아...그 길은 생각조차도 할수 없던 것이고 나날이 내 목구멍을 해결하고자살았던 시간였다..- 이런 생활이 임시겠지?아니었다.신앙촌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은 어떤 나의 노동의 댓가지 어떤 정신적인내 진실을 원한것은 아니었다.신앙심??그건 여기 신앙촌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나 보담도 더 독실하고 더 열성적인 사람이 밟힐 정도였으니.............- 그렇게 어떤 꿈도, 돈도 벌지 못할 바엔, 나와 함께 춘천에 가서 장사하자꾸나..........강원도 인제가 고향인 전도사 지망생인 분의 권유(?)가 귀에 솔짓하게 들렸다.온순하고 매사가 정이 넘치게 유모가 넘치던 그 김 귀덕아저씨....내가 여가 온 것은 이런 생활이 아니지 않는가?초라하게 이렇게 남의 공장에서 서툰 짓으로 내 밥벌이를 하기 위해 온것은 아니지 않는가?그럴 바엔 차라리 강원도 춘천에서 그 아저씨 말 처럼 장사나 해 볼가?구경도 하고 경험도 쌓는다는 것으로...그 아저씬,춘천의 효자 국민학교가 있던 효자 2 구의 어떤 허름한 집을 전세를얻었다.그 당시의 신앙촌 제품의 명성을 뒤에 업고서 그 사업을 할려는 계획.나완 진이는 그 중에서도 외부 사원으로 팔러 나가게 하고,거긴 수공업으로 날렵하게 일을 하는 남여 약 10 여명.그 사람들을 신앙촌에서 데려왔다.모든 조건은 숙식을 해결하고 신앙촌 보담은 더 많은 보수를 약속하고..나와 진인.그 물건값을 저렴하게 쳐 주고 이문은 우리가 챙기는 조건.그 아저씬,숙련공이 만든 것을 나와 진인 외부로 팔러 다니는 것.돈만 투자해 놓고 대박을 터트린단 야심찬 계획.그 한달 정도는 불티나게 팔렸다.야간 작업을 해야 공급이 가능한 물건..나도, 진이도 한 조가 되어 다님서 호주머니가 두둑해 짐을 은근히 기뻐함서 여기서 어떤 전기를 마련하자.- 신앙속에서 살지 못할 바엔 세속의 돈이나 벌자...한달이 지나서 춘천에도 서울서 직접 배달하는 신앙촌 제품이 들어왔다.우리가 거래했던 곳에 엄연히 신앙촌의 zion의 상표를 붙이고 싸게 공급이 되니 우린 상대가 안 되었다.그 상표,그 빛나던 zion 상표가 가짜라고 해도 막무가내..하긴,우리도 여기서 직접 만든 것이라 진정한 신앙촌 제품은 아니지..-made in zion은 아니다.배달처에 공급하고 수금했던 그런 장사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고임금이 체불되자 모두들 신앙촌으로 돌아갔다.남은 제품을 싸게 처분하려던 아저씨는 나중엔 우리와 함께 행상으로 나서서 팔려 했지만,되지 않았다.그때에 그 물건 싣고서 인제도 가고 원통도 가보고 서화도 가보고 샘밭도 가보곤 했지....원시림이 울창한 인제의 숲........아람들이 나무들이 해를 가려서 한낮에도 어둡게 보였던 원시림..지금도 그런 숲으로 그대로 남아 있을가?내일의 꿈을 꿀수도 어떤 바램도 보이지 않던 그 몇 개월의 춘천생활.그 초라한 생활을 했던 그런 날들이 나의 가장 길고 외로운 시절이 아니였을가?생후 처음으로 들어가본 강원도의 오지....몇몇의 관광지는 가보았지만,털털 거리는 버스를 타고 인제와 원통까지 언제 가보았던가?그 아저씬,자기의 고향이라 그런 와중에서도 자랑이 떠날듯 했다.인제군 원통리의 버스 종점엔 몇몇의 식당과 술집도 있었고,< 월계수 다방 >이란 다방도 엄연히 있었다.거기에 어슬렁 거리는 사람은 대부분이 군인였고.....그 부근 초라한 여인숙에서 숙소를 정하곤 우린 밤에 월계수 다방에서잡담도 하고 소주도 몇잔하곤 했지...그 힘들었던 그 춘천 생활.햇볕에 얼굴을 까맣게 태움서 다녔던 행상.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가?젊다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 것인가 보다.춘천,내가 집을 떠나 처음으로 세상속으로 들어가 인생의 의미와 삶을 생각해 봤던 가장 힘들고 가장 초라했던 시절였던거 같다..........< 소양 극장> < 신도 극장 >들은 비가오는 날이면 어김없이가서 보던 영화관였다.지금도 그곳에 있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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