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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건립

김 구 기념관과 박 정희 기념관 건립.두 기념관 건립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가 보다.너무도 대비되는 두 인물.한 분은,일제 식민지가 싫어 해외로 나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온몸을 던져독립 운동했던 애국 지사고,한분은,충량한 황국 신민으로의 맹서를 했던 일본군 장교.효창공원은 백범의 묘소를 비롯한 윤봉길, 이 봉창,백정기의 묘소가 있는 곳이고 이곳은, 일제가 강점하면서 동학농민때 일본군의 주둔으로 공원이 되었던 곳이다.임정요인들이 환국함서 그들의 무덤을 이곳으로 이장했고,국민장으로 치러진 백범의 묘도 여기에 묻혀 있다.이 승만은 여기에 참배하는 사람들을 제한했고 철조망을 쳐서 출입을 통제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운동장 만은 안된다는 애국지사들의 호소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승만은 여기에 운동장을 만들었다.효창 운동장.상해 임정의 넋이 서린 곳을 운동장으로 만든 발상이 발칙하다.백범 김구 선생이 누군가?친일파들이 일본의 앞잡이로 빌 붙어 온갖 호사를 누릴때,이들은 낯선 타국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을 기꺼히 던지지 않았던가?돈도 없고, 누가 알아 주지도 않은 그런 독립운동 ..누굴 위한 그런 투쟁였을가?그런 곤난의 세월을 딛고 조국이 광복이 되었을때 상해 임정 요원들은환대도 못 받고 쓸쓸히 국내로 들어왔다.엉뚱한 사람들이 독립 운동을 했네.애국자네 함서 이미 조국은 선점한 사람들이 지도자인척하고 있었으니..정작,상해 임정요원들은 설자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가??조국이 광복이 되었으면 당연히 정부는 그 임정 요원들이 접수하고 조각에 착수하고 정권을 담당했어야 하지 않았을가?상해 임시 정부는 유일한 그때의 임시 정부였으니깐.....임시 정부가 해방으로 정식 정부가 되었어야 우리가 법통도 살고민족정기도 세우고 국가의 틀도 다졌을텐데........???- 이 승만의 집권,그건 우리에겐 비극였다.그는 독립운동을 했지만 고생도 하지 않고, 미국을 등에 업고서 유창한 영어로 조야를 많이 알아 집권이 쉬웠을거다미국도 고집 불통인 김 구보담은,미국을 잘 알고 미국의 은혜를 입은 이 승만의 집권을 원했을거고...친일 잔재가 청산 되지 못했고,민족정기를 세울 절호의 기회도 무산해야 했다.이 승만을 도운 건국의 머리들이 모두가 친일파 일색이었으니,어찌 민족정기 운운 하겠는가?박 정희도 친일에선 자유롭지 못한 인물.그가 일본군의 장교로 된것은 가난한 환경탓이라고 할수 있겠지만,일본군 장교로 황국 신민으로의 맹세한 것은 두고 두고 그가 친일에서 떳떳하다고 말할수 없는 족쇄가 아닌가?< 박 정희 기념관 건립 >상암 근린 공원에 건립 중인 그의 기념관은 500 억원 국민 성금을 조건으로 208 억원의 국고 지원을 했다 한다.가장 심한 박해를 가했던 박 정희를 위한 김 대중 정권 시절에.....500 억 성금 목표는 겨우 3 %가 모금 된 16 억원.이러니 모든 경비가 국고로 충당하게 생겼다.박정희가 가난한 나라를 가난을 면하게 해준 그 공은 어쩔수 없다해도그가 남긴 아픈 상처들.18 년간의 암흑 정치는,그리고 그 그늘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민주화 후퇴와 경제 도약이란 미명하에 짓 밟힌 인권..그 조각난 상처들은 어떻게 치유하고,오늘날 동서로 갈라진 그 지역 감정....지역 정서를 부추겨 아직도 살아있는 그 지역감정의 망령.그 상처가 얼마나 큰 가?박 정희에 대한 정당한 평가.그 평가가 나기도 전에 그를 위한 기념관 건립을 추진 한것은 좀 경솔한처사가 아닌가?- 왜 김 대중 대통령은 자기의 재임중에 그의 기념관을 건립하지 못해안달을 부리는가?53 년간이나 기다려온 김 구 선생의 기념관은 이렇게 늦었는데....?일본에 결연히 앞서서 독립 운동을 했던 민족의 지도자 김구,일본의 그늘에서 그 들의 군인였던 박 정희..........아이러니 하게도 두 기념관을 건립하고 있단다.두 기념관을 둘러 볼때,국민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가?두 사람을 같은 선상에서 보고 비슷한 평가를 내릴것인가?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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