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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못난 자화상

 

군 제대후,

백수로 지낸 10개월.

견디기 힘들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3년간의  군 생활은 나름대로 보람과, 사회 복귀에의 꿈으로 들떴는데 ......

막상 제대하자 들어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여지없이 무너진 꿈.

 

배경도, 경제력도, 학력도 어떤 것도 남들보다 뛰어나질 못했으니........

농촌출신이면 땅에 매력을 느끼고 일하고 지내면 되는데,꿈은 아니었다.

농촌을 탈출하고만 싶었다.

비전을 느낄수 없었던 현실인 농촌.

탈출만이 성공의 첩경으로 보였다.

허황된 꿈이었나?

 

누구보다도 엘리트였던 아버지의 삶.

농촌에 몸을 담고 계셔도 전혀 촌부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던 아버지.

그게 아버지 만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나?

맨몸으로 조국을 떠나 일본체류 7년.

나름대로 돈도 벌었고 생활기반도 잡혔지만, 인심 후하신 아버진 모든것을 못사는 형제들에게

배분해줘 그 가난의 굴레는 벗어나질 못했나 보다.

-니 아부진 속을 못차려 니들이 고생을 해야.

멀라고 벌어온 돈을 형제들에게 나눠 줄것이냐....?

그 형제들이 알기나 한다냐..??

그러니 이렇게 어렵게 살지..

우애는 돈독해도 ,정신 못차린 탓에 고생하는 우리들 보고 외 할머닌 늘 그랬었다.

그런 아버지의 철학이 미웠나 보다.

 

일은 건성으로 하고 맨숭맨숭 놀고 있는 내가 딱해 보였을까?

자존심 강한 아버지가 부 면장으로 있는 당숙에게 취직을 부탁한 모양.

-니 당숙에게 니 애길 했다.알아보겠다 하더라.

언제 부르거든 가봐라...

-네.

귀가 번쩍 띄었다.

백수탈출??

 

부 면장인 당숙의 빽으로 일단 면사무소 임시직으로 들어갔다.

맨입이 아닌 거금 5만원(?)을 아버진 이미 당숙에게 주셨다고 했다.

매달 급료가 1만원 정도였으니 5만원은 거금임에 틀림없었지.

아무리 친척이 주선한다해도 맨입으로 되는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10월 초순 임시직이지만, 희열였고 대단한 긍지였다.

백수에서 그야 말로 면사무소 직원(제 3자가 임시직인지 정규직인지 모른다)으로 당당하게

출근했다.

형의 번쩍이는 자전거를 타고 반듯한 신작로를 달리는 기분은 신났다.

-아 드디어 백수탈출이구나......

 

이미 면사무소는 10여명의 기존임시직 직원들이 있었다.

모두가 30 후반의 노련한 사람들 중에 젤로 어렸던거 같다.

사무소엔, 각자의 책상은 없었고, 웅성 웅성 모여서 잡담이나 하는 장소만 한켠에

있을 뿐였다.

-행정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 출장해서 농민들 상대로 농사지도를 하는게 주임무다.

-자건거와 운동화에, 잠바차림으로 출근하라.

-그날 그날의 임무는 산업계장이 관장하니 지시 받으라.

첫날 면장의 애기였다.

 

보리파종 권유, 볍씨 담그는법, 논둑의 자투리 땅에 콩등을 파종하기 권유,누에치기 사업 지도 등등..

매일 매일 각 부락으로 출장하고 지도하는게 임무였고, 그 날 그날의 업무는 복명서 한장 제출로

업무가 마감되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오늘은 이 부락, 내일은 저 부락으로 출장하여 이장님들과 점심도 함께 하고 막걸리 잔도 나눈것이

즐거움였다.

운동화는 흙으로 더럽혀졌어도, 뭔가 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대단했다.

동네 사람들도 조금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곤했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킬수 있는 보루인거 같았다.

 

면사무소의 직원들은 거의가 그 면의 연고를 가진 사람으로 배치했다.

직원들 모두가 한집걸러 형님, 아우, 선배등으로 아는 얼굴들.

1년후배 최 경희가 고참서기로 당당하게 위치하고 있었다.

초등시절엔, 눈여겨 보지도 않았던 후배.

현재가 중요한 것을 어쩔건가?

-최 주사님하고 호칭했고, 선배님으로 불렀지만 부끄러웠다.

고교 졸업하자 마자 응시해 고참서기가 될때까지 난 뭣을 했던가?

왜 c/t로 외도하다가 늦게야 겨우 임시직으로 들어왔단 말인가...

 

연말엔,

임시직은 새로 임명한단다.

계약기간이 1년이라 어쩔수 없다고 했다.

다시 재 임명을 받아야만, 다시 다닐수 있는 운명(?)

그런 제도인줄 몰랐는데...........

-저 당숙,

내년에 새로 임명을 받아야만 다닐수 있다는데 어쩌죠?

다시 손을 써야 하는거 아닌가요?

-걱정마, 겨우 2달 다녔는데 변경하겠어?내가 애기 할테니까 걱정마.

믿었다.

 

다음해 1 월 재임명시,

보기좋은 탈락였다.

10명에서7명으로 줄였단 이유..

 

겨우 2달 고생하면서 다닌 직장.

그거 할려고 부탁하고 거금 5만원을 투자(?)하고 그랬던가?

비정한 세상이 원망스러웠고, 미웠다.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임시직 사람들은 나름대로 대단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였다.

군수,군청 과장 급들 정도의 배경을 가진사람들였지만,

난, 아니었다.

그렇다고,어떻게 겨우 2달고용하고 자른담??

너무한거 아닌가.

 

1월 면사무소를 찾아가 해고되었단 통고를 받고 돌아오던날.

소나무 숲이 있는 동산에서 한참을 울었다.

-든든한 배경없음에, 못난 자신에,비정한 세상을 바로볼줄 모른 우둔한

안목에 울분이 솟았다.

-그래, 세상은 비정한거야.

어느 누구도 날 주목해주고 이끌어 주질 않아.

내가 스스로 만들어 가야해.

당당하게 시험으로 패스해서 오늘의 수모를 날려 버리자.

내가 뭐가 모자라 당당하게 못들어간단 말인가, 꼭 할거야..

오늘의 비참함을 절대로 잊어선 안돼.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위기가 기회라 했던가?

그 사건이 되려 나를 더 강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때,

그대로 주저앉았다면 어벙벙하게 그대로 끝났을것 같다.

기회가 주어졌음 정식으로 되었던가,임시직으로 끝냈던가..

이를 악물고 공부하게 만든 계기가 바로 그 사건였다.

 

허나,

그 당시의 나에 대한 존재감은 비참했다.

그것 보담 초라한 자화상을 설명해야 하는것이 더 아팠다.

설명후에,

아버지의 상심을 지켜본단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고...

지난날의 못난 자화상을 다시금 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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