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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관
기로가 나에게 책임을 할당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일요일 일요일 밤에란 tv프로가 있었다.

"예"와 "아니오"를 나누어서 두가지 경우 모두를 그려보고 예측하느 프로그렘이었다. 상당히 재미있는 프로그렘이었는데 어영부영 이상하게 끝을 보고 만 듯하다. 그 이유는 프로그렘이 선한 동기에 나쁜 결론을 보인다던가 나쁜 동기에 잘 되고 또한 어떻게 움직여도 나쁜 결론 어떻게 움직여도 좋은 결론등 뚜렷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해서 였을 듯 하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인가에 중요한 기로라 생각하는 점들을 만난다.

어떤 때는 크게 내가 생각하는 점들과 더불어서 만나고

어떤 때는 내가 생각치 않던 점들과 만나서 이런 기로를 형성한다.

이런 기로 앞에서 아무 긴자을 하지 않는 것은 기로라 할 수 없겠지만

이런 기로점들 앞에 너무 큰 긴장으로 이 것의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것은 참 멍청한 일이라 꼬집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로에 있을 때에는 중요한 점들이 많이 있지만

이 기로점을 지나면 세상 이치에 맞게 상황 설정에 맞게 움직여지는 것이

사리에 맞고 그에 대한 바른 결론을 이끌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로점에 있을 때의 긴장감과 긴박성에 비해 그에 대한

결론과 시사점은 그리 크지 않은 경우가 많다. 물론 많은 대중 앞에서

일을 하는 중요직책에서 같이 공유하는 질서는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질수

있겠으나 그런 경우에서 조차 이치의 당연과 사리의 구분은 충분히 선행

되어 진다고 하는 점을 예로 들으면 이 기로점은 우리에게 그리 많은

책임을 할당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중요직책에 있으면 이에 따라 말들이

많아지고 못 믿겠다 믿겠다 하는 예기 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런 점들이

삶의 순리에 역행의 시점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고 삶의 기로를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삶의 기로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 많큼 삶을 진지하게 보고 삶의 변화와 의미 그 양태를 결정

할 의미를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을 때가 많다. 하지만 이 기로가 없다

하여서 살아있고 죽어 있고의 의미를 가지는 것 또한 아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책임감의 무게에 대한 대처에 순응하느냐 벗어남을 바라느냐의

묘한 역학이 배어 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삶의 기로가 우리에게 어떠한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따른 대비를 적절히 해야 하며 삶의 개인적 시사점을 느끼고 체험해

나가야만 삶을 조금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기로가 주는 무게감에 비해 그 결과는 초라 할 뿐이면 그 점

들이 우리에게 그리 크지 않은 책임감의 할당을 가지고 온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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