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연휴다. 날씨가 오랜만에 맑고 아름답다. 부모님과 형님이 보고 싶다. 고향을 내려가면 부모님 산소도 찾아보고 고향 어르신들에게 인사도 드리고 친구들도 만나보려고 한다. 네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확인해보니 4시간 30분 소요된다고 한다. 느리게 느리게 여행하는 마음으로 나 혼자 모닝을 타고 출발을 하였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뭉게뭉게 아직은 물들지 않은 초록의 이파리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초등학교 어린이의 소풍가는 마음으로 가슴 설레며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교통 정보처럼 정말로 차량의 행렬이 느리게 느리게 움직인다. 출발한지 2시간 30분 걸려 천안 망향휴게소에 도착을 하였다. 배도 고프고 특별히 누가 기다려주는 것도 아닌데 급하게 갈 필요도 없었다.
예전에는 아버님이 계셔서 하룻밤 아버지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면서 다녀온 날들이 있었다. 그 때 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난 나를 향하여 지나간 이야기들을 매번 들려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참 우리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이었다. 본인 밖에 모르는 풍류를 좋아하신 할아버지를 만나 글도 배우지 못한 일자무식이었지만 3남 2녀를 건강하게 이 사회의 일원으로 이끌어주신 분이셨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한다. 가족을 위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고 인생을 알아갈 수 있게 몸으로 가르쳐주신 분이다. 그런 아버지를 위하여 나는 아버지의 가훈을 만들었다. 성실, 인내, 노력, 아버지의 가훈이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어 일하면서 공부를 하였다. 어느날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아버님과 초등학교 은사님에게 논문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어느 날 나에게 말씀을 하였다. 김용환 선생님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윤택이한테 논문을 받았는데 아들 잘 키웠다”고 하시더라고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우쭐하셨다고 한다.
어느 해 겨울 오랫동안 홀로 계시는 아버님이 안쓰러워 나는 고향에 내려간 당일 형님에게 말씀을 드리고 아버님을 모시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려 도로에 온통 눈으로 쌓여 빙판길이었는데도 무사히 올라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며느리를 통하여 따뜻한 밥상과 반주로 일주일을 대접하고, 성남에 사는 여동생과 양평에 사는 남동생에게 일주일씩 부탁하면서 지켜야할 한 가지를 부탁을 하였다. “아버지가 식사할 때마다 반주로 소주 한잔씩 드려라. 더 이상은 안 된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보름날 척사대회에 나갔다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나는 응급조치를 취하고 서울로 모셔 오라고 하였다.
풍납동에 있는 한방병원에 입원하여 아버지를 치료하였다. 형님에게 보고를 하는데 듣자마자 나에게 호통을 치면서 “너가 모시고 갔으니 너가 책임을 져라” 나는 6개월 동안 내가 모셔온 죄로 낮에는 직장에서 근무하고 저녁에는 병원에서 아버지를 간호하였다. 병명은 뇌졸중, 아버지는 차도가 없으셨다. 그렇게 3년 동안 아버지는 병원에서 생활하시다가 걸어보지도 못하고 병상에서 운명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아버지가 운명하시기 몇일 전부터 식사를 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를 먼저 가신 어머니와 합장을 해드렸다.
나는 지금도 아버님에게 죄인이다. 고향에 갈 때마다 아버지가 드시는 약을 관찰하였더라면 사전에 아버지에게 닥칠 뇌졸중 예방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가져본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차량들과 사람들로 코로나19 이전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주비빔밥으로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다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석양에 물들어 가는 황금물결을 바라보며 무사히 고향집에 도착을 하였다. 오랜만에 아버지의 집을 방문하여 형님과 인사를 나누고 지금까지 하루를 머물지 않았던 집을 이틀이나 머물면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형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형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런 형님이 지금 아버지처럼 약으로 살아가고 있다. 형님과 한 방에서 하루 저녁 잠을 청한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처럼 일자로 드러누워 이야기를 나눈다.
10월 연휴다. 날씨가 오랜만에 맑고 아름답다. 부모님과 형님이 보고 싶다. 고향을 내려가면 부모님 산소도 찾아보고 고향 어르신들에게 인사도 드리고 친구들도 만나보려고 한다. 네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확인해보니 4시간 30분 소요된다고 한다. 느리게 느리게 여행하는 마음으로 나 혼자 모닝을 타고 출발을 하였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뭉게뭉게 아직은 물들지 않은 초록의 이파리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초등학교 어린이의 소풍가는 마음으로 가슴 설레며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교통 정보처럼 정말로 차량의 행렬이 느리게 느리게 움직인다. 출발한지 2시간 30분 걸려 천안 망향휴게소에 도착을 하였다. 배도 고프고 특별히 누가 기다려주는 것도 아닌데 급하게 갈 필요도 없었다.
예전에는 아버님이 계셔서 하룻밤 아버지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면서 다녀온 날들이 있었다. 그 때 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난 나를 향하여 지나간 이야기들을 매번 들려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참 우리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이었다. 본인 밖에 모르는 풍류를 좋아하신 할아버지를 만나 글도 배우지 못한 일자무식이었지만 3남 2녀를 건강하게 이 사회의 일원으로 이끌어주신 분이셨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한다. 가족을 위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고 인생을 알아갈 수 있게 몸으로 가르쳐주신 분이다. 그런 아버지를 위하여 나는 아버지의 가훈을 만들었다. 성실, 인내, 노력, 아버지의 가훈이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어 일하면서 공부를 하였다. 어느날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아버님과 초등학교 은사님에게 논문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어느 날 나에게 말씀을 하였다. 김용환 선생님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윤택이한테 논문을 받았는데 아들 잘 키웠다”고 하시더라고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우쭐하셨다고 한다.
어느 해 겨울 오랫동안 홀로 계시는 아버님이 안쓰러워 나는 고향에 내려간 당일 형님에게 말씀을 드리고 아버님을 모시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려 도로에 온통 눈으로 쌓여 빙판길이었는데도 무사히 올라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며느리를 통하여 따뜻한 밥상과 반주로 일주일을 대접하고, 성남에 사는 여동생과 양평에 사는 남동생에게 일주일씩 부탁하면서 지켜야할 한 가지를 부탁을 하였다. “아버지가 식사할 때마다 반주로 소주 한잔씩 드려라. 더 이상은 안 된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보름날 척사대회에 나갔다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나는 응급조치를 취하고 서울로 모셔 오라고 하였다.
풍납동에 있는 한방병원에 입원하여 아버지를 치료하였다. 형님에게 보고를 하는데 듣자마자 나에게 호통을 치면서 “너가 모시고 갔으니 너가 책임을 져라” 나는 6개월 동안 내가 모셔온 죄로 낮에는 직장에서 근무하고 저녁에는 병원에서 아버지를 간호하였다. 병명은 뇌졸중, 아버지는 차도가 없으셨다. 그렇게 3년 동안 아버지는 병원에서 생활하시다가 걸어보지도 못하고 병상에서 운명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아버지가 운명하시기 몇일 전부터 식사를 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를 먼저 가신 어머니와 합장을 해드렸다.
나는 지금도 아버님에게 죄인이다. 고향에 갈 때마다 아버지가 드시는 약을 관찰하였더라면 사전에 아버지에게 닥칠 뇌졸중 예방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가져본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차량들과 사람들로 코로나19 이전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주비빔밥으로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다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석양에 물들어 가는 황금물결을 바라보며 무사히 고향집에 도착을 하였다. 오랜만에 아버지의 집을 방문하여 형님과 인사를 나누고 지금까지 하루를 머물지 않았던 집을 이틀이나 머물면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형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형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런 형님이 지금 아버지처럼 약으로 살아가고 있다. 형님과 한 방에서 하루 저녁 잠을 청한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처럼 일자로 드러누워 이야기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