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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래니
비밀이지 않은 비밀들의 행렬
철수, 영희 관람후기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오후 4시 43분의 방이

오후 4시 44분의 방에게

나를 건네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中-


철수라는 이름과 영희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다. 아니 흔한 이름이었다.

철수라는 사람과 영희라는 사람은 흔한 모습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선희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다.

선희라는 사람의 모습은 흔한 모습이다.

하지만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


예전에 영화 싱글즈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나난, 내 친구는 동미. 이런 성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기면 나와 친구는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때는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열아홉의 나이였다.

그리고 후에 뮤지컬로 싱글즈를 보았다.

29에서 30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서서 삶을 노래하는 그들을 보고, 23살의 나는 스물아홉을 그려보고, 서른을 꿈꿨다.


그리고 스물여섯이 되었다.

여태 살아온 날들보다 스물아홉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짧다. 그래도 아직은 스물아홉이 된다면, 서른이 된다면 뭔가 달라져 있을 거라고 바보같이 믿어본다. 내 주위에 나보다 나이 많은 이미 스물아홉이 되었거나 서른을 훌쩍 넘긴 언니오빠들을 보면서도 말이다.


그러던 중 문구가 마음에 드는 연극을 발견했다.

-이웃집 세탁소집 영희는 장사를 하고,

 우물가 옆에 살던 철수는 공장에 다니며,

 꽃이 예쁘게 피던 복숭아집 영희는 나의 아내가 되었다.-

뭐 이런 느낌의 글이었는데, 다시 그 글귀를 찾아보려고 해도 어디 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어쨌든, 그 문구가 아니더라도 청춘별곡이라던가, 종이비행기가 날아가는 그림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나의 호기심을 이끌기엔 충분했다.

그 문구를 보고 정말 이 연극 안보면 정말 크게 후회할 것 같아 안달 났었지만…….


두 번의 기회를 놓치고, 한 번의 선약이 미뤄졌지만, 결국은 끝끝내 보았다.

그리고 감동했다.

아, 인간승리! 이런 건 꼭 봐줘야 한다.


쓰다 보니 무슨 말을 쓰고 있는 건지 참…….;;


철수, 영희는 고소공포증을 앓고 있는 영화감독지망생인 철수가 은행에 다니며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 영희의 옆 건물 옥탑 방으로 이사 오면서 시작된다. 철수는 못생겼다. 키도 작다, 배도 나왔고, 돈도 없다, 가진 건 꿈을 향한 열정뿐이다. 극중에선 그마저도 포기단계였지만.

그에 비해 영희는 날씬하다. 얼굴도 예쁜 편이고, 안정적인 직장도 있고, 현실적이다.


이사 온 철수는 영희를 보고 낯익었다며 자꾸 말을 건다. 고소공포증으로 인해 건너가지는 못하지만, 속옷 사건 이후로 철수와 영희는 가끔 옥상에 나와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한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스물아홉, 같은 나이.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지만, 너무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내 친구들만 봐도 내 친구들도 철수와 영희처럼 둘로 나뉜다. 꿈도 없이 그저 먹고 사는 것에만 급급한 현실안주타입과, 꿈이 있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꿈을 외면하고 시간만 허송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도피타입.

철수와 영희를 보면서 나는 현실도피일까, 현실안주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데 결론이 나지를 않는다.

꿈도 있지만, 현실도 놓을 수 없다. 두 군데에서 발목 잡혀서 가랑이가 찢어지는 상황인지, 꿈과 현실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고 있는 건지는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좋게 말해서 토끼고, 나쁘게 말하면 뱁새다-_-


어쨌든 두 사람은 티격태격 하면서도 정이 들고, 그 와중에 영희의 삶과 철수의 삶을 보여준다. 속이 터지고 억울할 정도로 답답한 삶을 사는 영희가 그것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건 아니야’ 라던가 ‘나라면 저렇게 안살아’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정말 내가 영희라면 쉽게 내던지는 ‘그렇게 안살아.’가 될까. 하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능력 없이 그저 뒹굴 거리기만 하는 철수를 보면서도, 철수의 아버지가 바람이 나서 엄마와 이혼한다는데, 철수의 아버지가 라면집 주인에게 해주고 싶은 것을 철수에게 부탁한 것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 답답해도 정말 나라면 외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말리지도 못한다.


우리의 삶은 얽히고 꼬여 있다.

아무리 꿈을 위해 산다고 해도, 아무리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자신만을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그 얽히고설킨 것을 풀어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보 같은 철수가 보이고, 숨 막히는 영희를 보고도 화낼 수 없다.


그런 그들은 스물아홉. 곧 있으면 서른이다.

서른이 되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 믿었지만, 그들의 생활에서 서른이 된다고 달라질 것은 없는 것 같다.

서른을 꿈꾸지만 우리가 원하는 서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시간이 아날로그로 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바라던 30살의 모습이 직장을 안정적으로 다니며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는 것이라던가, 아니면 한 사람의 아내로써, 엄마로써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었다고 생각해보면, 20살에 내가 그런 모습을 꿈꿨는데 30살에 아이 엄마라면 그 꿈은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29살 12월 31일에 보는 스물아홉과 다음날인 서른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사는 것은 계단을 올라가듯 순차적으로 올라가는 것이지 어느 한 순간에 엘리베이터를 탄 것처럼 위층에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단을 걷고 있으면서 엘리베이터를 꿈꾸기 때문에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서 더 답답해하고 막연해지고 방황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막상 서른이 되고 나서 결과를 보면 계단으로 올라왔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던 내가 위층에 있는 것은 다를 바가 없는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서른이 돼야 알게 된다고 하는 건가보다.


하지만 내가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아서 모르고, 스물아홉도 되지 않아 조바심이 그렇게 나지 않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이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다. 1층에서 문이 닫히고, 문이 열리면 어느 순간 무언가 달라진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지금 이렇게 지내고 있지만, 서른쯤의 나는 이것 하나정도는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 바람이랄까?


이런 기대가 아직 있는걸 보면 나도 아직 많이 어리긴 어린가보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연극이었다.

볼 수 있어서 다행인 연극이었고, 멋진 대사, 착착 감기는 대사, 눈물 나는 대사, 감동적인 대사, 달콤한 대사, 씁쓸한 대사, 밋밋한 대사, 알싸한 대사들로 가득한 공연이었다. 삶을 이런 대사 안에 다 담아 연극으로 만든 것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영희가 철수에게 바나나킥 이야기를 할 때였다.


비록 진짜는 아니지만, 설탕보다 더 달콤하고, 아이스크림보다 더 부드러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


부드럽지만 목이 막힐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좋은 연극이었지만,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서 머릿속이 복잡해서, 전에 썼던 여느 후기보다 가장 정신없고 복잡한 후기를 쓰게 하는 연극이 되어버렸다. 이건 내 탓이지 뭐…….


어쨌든 철수와 영희는 막을 내렸지만, 다음 달에 새로 시작한다는 신작이 벌써부터 기대되고 있다. 같이 갔던 동행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이 공연을 한 극단의 공연이라면 일부러 시간 내서 볼 가치가 있어.”

하하하. 100%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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