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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먹은 화선지처럼 부풀어 오른다

2023년 2월 23일 그린하우스 일기를 쓰다.

아줌마와 여사의 기준이 어떻게 다른지 오늘도 실감하게 한다. 아줌마는 어딜가든지 목소리가 크고 왁자지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덤벙대고 여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반면에 여사는 다소곳하고 품위있고 예의를 갖추고 행동에 조심을 한다. 나는 아줌마보다는 여사가 여성답고 아름다워 보인다.

오늘도 새로운 책에 손을 담갔다. 최예선 님이 쓴 2014년 글 서울의 풍경과 오래된 집을 찾아 떠나는 예술 산보,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 그곳에서 박경리의 과거를 만날 수 있어 반가웠고, 내가 알고 있는 박경리와 모르고 있었던 박경리의 현 주소를 새롭게 알 수 있었다.

박경리의 고향은 통영이다. 한동안 충무로 불리다가 다시금 통영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그 도시는 봄이면 물빛 바다를 만끽하려는 관광객들로 넘친다. 풍족한 어패류의 싱싱한 내음이 온 도시를 가득 채우는 그곳에서 박경리는 '금이'라는 이름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금이는 키가 크고 잘 생긴 남자와 결혼하여 통영을 떠났다. 조선총독부 전매국에 소속되었던 그는 광복 후 1946년에 인천 주안염전을 관리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금이는 그를 따라 인천 금곡동 59번지의 주안염전 사택으로 살림을 들여왔다.

한국전쟁으로 그들 가족은 파국을 맞이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유능한 젊은이였던 남편은 새로운 사상에 심취되어 있었고 그것이 전쟁 중 부역혐의로 번져 형무소에 수감된 것이다. 사형을 당했다고도 하고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지만 전쟁 중 사라진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 길은 없었다.

이 여인은 두 개의 존재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시대를 살았다. 산맥처럼 거대한 글 감옥의 간수이자 수인이었던 박경리 안에는 씨를 뿌리고 꽃을 심고 수예점을 열어 작고 예쁜 것들을 만들어 팔던 박금이가 있었다. 둘은 하나이면서도 함께 할 수 없었다.

대하소설 토지는 하나의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박경리 선생은 어린 시절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거제도 어디쯤에 있는 너른 평야에서는 나락이 누렇게 익어가는데, 수확할 사람들이 모두 호열자(콜레라)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선생은 토지1부의 배경인 하동 평산리 마을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토지 2부의 주요무대인 북간도의 거친 평원도 아주 먼 후에야 발을 디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낸다. 이야기가 글로 실현되는 장소는 낮도 밤도 침범하지 못했던 정릉집이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라는 구절이 있는 '일 잘하는 사내'라는 글에서는 고단한 회한이 느껴진다. 생명이 마치 모조품처럼 겨우 숨 쉬던 시절을 감내하고 신화가 된 인생 한 토막이 정릉집에서, 원주의 집에서 물 먹은 화선지처럼 부풀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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