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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바라기
글쓰시고 싶으신 분 아무 분이나 남기세요.그런데, 너무 무미건조할까봐 미리부터 걱정되네요. ^^*
의식에 따라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왕이 총리 대신과 경호원을 대동하고 사냥을 나갔다가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고, 그들은 제각기 떨어져 숲속을 헤매고 다니다가 나무 밑에 앉아 있는 늙은 장님 거지와 마주쳤다.

제일 먼저 장님 거지와 마주친 사람은 경호원이었다.

"당신 같이 늙고 눈 먼 사람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노인이 대답했다.

"보다시피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네.  하루 종일 구걸하다가 날은 저물어 가고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쉬러 온 것이라네."

경호원이 말했다.

"그렇다면 도시로 가는 길을 알려 줄 수 있겠는가?"

노인이 말했다.

"물론이지.  그런데 먼저 말해 두고 싶은 게 있네.  자네는 계급이 낮은 사람 같은데......  아마 시종이나 경호원쯤 되겠지.  노인한테 말하는 법도 모르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노인은 기꺼이 길을 알려 주었다.

다음으로 총리 대신이 노인과 마주쳤다.  그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

"노인장,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제게 길을 알려 주신다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방금 전에 당신의 일행인 듯한 사람이 지나갔는데,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었소.  이러이러한 투로 말하던데 그가 경호원 맞소?"

총리 대신이 말했다.

"노인장께선 눈이 안 보이시는데 그걸 어떻게 아신단 말입니까?  하여간 노인장께선 대단히 현명한 분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는 경호원입니다.  그가 무례를 범했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아무도 내게 무례를 범할 수는 없소.  삶이라는 것이 내게 무례를 범했을 뿐이지.  그런데 당신은 예절이 바른 사람이구려.  아마 왕의 신하나 총리 대신쯤 되겠는 걸?"

노인이 길을 알려 주자, 총리 대신은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왕이 왔다.  그는 노인의 발 아래 엎드려 예를 올리고 말했다.

"여기 오래 계시면 안 되겠습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궁전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자, 그러니 길을 알려 주십시오."

노인이 예를 표하며 말했다.

"당신의 자비심으로 보아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이 나라의 왕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왕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당신은 마땅히 왕이 될 만한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이 오기 전에 총리 대신이 지나갔고, 그 전에는 또 경호원이 지나갔지요."

왕이 말했다.

"아니, 앞을 볼 수 없는 분이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그런 질문은 하지 않는 게 더 좋을 뻔했군요.  나도 한때는 조그만 왕국의 왕이었지요.  비록 왕국은 잃었지만 기억력과 의식까지 잃지는 않았답니다.  나는 굳이 눈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태도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요.  당신은 왕이라서 품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품위가 당신을 왕으로 만든 것입니다."

왕은 그 노인을 궁전으로 데려와 나머지 평생 동안 손님으로 머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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