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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아가씨
...
꿈에 그리던 맛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였다.

공책에 붙이는 스티커 시리즈 중에 과일 스티커 시리즈가 있었다.

과일 모양의 그림에 예쁘게 채색이 되어 있는데 그림을 손으로 문지르면 희한하게 해당 그림의 과일향이 나는 것이었다.

근데 사과, 딸기, 포도는 먹어봤는데 도무지 바나나는 먹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그 기막히게 달콤한 향에 도취되어 어린 마음에 바나나가 그렇게 먹어보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먹을게 귀하던 시절이라 부자집에서라면 모를까,

바나나는 구경도 하기 힘들 때였는데 어쩌다 친구의 친척 아저씨뻘 되는 사람이 외국에 나갔다 구해왔다며 식구들끼리 모여앉아 그걸 먹는데 우연히 끼게 되었다.

 

"바나나 먹어 본 적 없지, 한 번 맛볼래?"

따뜻한 목소리로 귀퉁이 한 조각 떼어 내게 내미는 친구 어머니 손 위의 바나나가

차마 입에 넣기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한참을 생긴 모양과 색깔, 냄새를 음미하다 드디어 입에 넣는 순간,

상상했던 맛과 너무 달라 나는 다소 어리둥절해졌다.

 

스티커를 닳도록 문지르면서도 향이 날아갈까 조바심 내며 꿈에 그리던 바나나의 맛은

포도처럼 달지도, 사과처럼 새콤하지도 않고 입안에 풋내만 가득했다.

 

'이게 뭐야, 도대체 무슨 맛인지 모르겠네.'

 

그날 이후로 내 머릿속의 '늘 먹고 싶었던, 꿈에 그리던 맛'리스트에서

바나나는 하릴없이 제외되었다.

 

너무 기대를 많이해서 실망도 컸던 걸까.

 

지금은 언제든 가까운 곳에서 사먹을 수 있는 과일이 되었지만 가끔씩 노랗게 잘 익은 바나나를 보면 그 시절이 생각나곤 한다.

 

모양과 향으로 사람을 꼬여놓고는 막상 개봉하면 별 볼일 없는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라 '빛 좋은 바나나'같으니....ㅎㅎㅎㅎ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내게 있어 꿈에 그리는 맛은 바로 엄마가 해 주신' 고등어 김치 조림'이 되었다.

 

내가 하면 아무리 해도 그 '맛'이 안난다.

똑같은 재료를 쓰고 넣는 순서도 똑같은데 어째서 엄마의 맛이 안나는 거지.

어머니, 어머니 손맛의 비결은 진정 조미료란 말입니까아~~~~!

 

 

라고는 하지만 실은 엄마는 화학 조미료는 전혀 쓰지 않으신다.

 

아유, 또 침이 고인다.

이런 미친 식욕.....

오뉴월에 걸신이라도 들렸나, 왜 돌아서면 배가 고프냐고!

 

"오마니, 오마니가 해 주신 고등어 조림이 먹구 시프와요오오."

담 달에 집에 가면 그렇게 졸라봐야겠다.

그럼 엄마는 "그래? 울 딸이 먹고 싶다면 해 줘야지."

라고 웃으시겠지.

 

낼 어버이날인데 아무것도 못해드려 죄송하지만 전화는 꼭 드려야겠다.

 

 

 

 

화츈
2012-05-08 00:36:15

비밀 댓글.
만년아가씨
2012-05-08 08:17:30

비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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