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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아가씨
...
이별의 미학

#1.


시골 시큰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재작년 경운기를 몰다 논두렁에 빠져 크게 다친 후로 
수술을 했지만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고서 매일을 술로만
지탱하며 병원입원과 퇴원을 거치다 집에서 숨지셨단다.
큰아버님은 아내인 큰어머님과 자식들에게 거칠었지만 
시집 온 조카며느리인 나에겐 다정하셨다.



문득 결혼하고 2년인가 3년 되던 해 시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을 이용하지 않고 이번에 돌아가신
큰아버님의 시골집에서 3일동안 초상을 치르던 때가 생각난다.
워낙 시골이고 아버님도 보수적인 분이라 그렇게 전통적 방법으로 초상객들을 접대하느라 힘들었었지.
물론 시아버님은  무척이나 두둑한 용돈으로 내 노고를 위로해주셨었다.
어쨌거나 그 때는 시할머니와 이렇다할 추억이 없어서인가 곡을 할 때도 별로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오늘
화장터에서는 생전의 그 어른의 다정함이 사무치기도 했고 운구할 때와 수골실에서 뼛가루를 받을 때의
큰어머님의 단장의 흐느낌은 절로 가슴이 아파와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평생 애증의 마음으로 그분을 지켜봤을 큰어머님의 마음이 어떨지, 또 그 자녀들의 마음이 어떨까 짐작해보았다.
그간의 과정이 어떻든 죽은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염을 하고 입관이 된 후 식장에서 조문을 받다 3일째 되던 해 발인되어 불과 한 줌 재로 변하기까지 한 시간여,
이젠 그 어른의 육신이 영영 이생을 떠날 때 큰어머님은 그렇게 괴롭혔던 남편에게 좋은 데 가시라는 말만
반복하며 우셨다.
시아버님은 결국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실 걸 그렇게 가족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사셨냐며 허탈해하셨고
큰어머님은 평소 남편을 보니 쌓아놓고 누리지도 못하고 가고 싶은 데 다니지도 못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젠 그렇게 살지 않겠다 선언하시고 우리에게도 당부하셨다.

이승에서의 인연이 더이상 이어질 수 없을 때 
대상에게 들었던 그간의 서운했던 감정과 고통의 기억들이 깨끗이
사라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영영 재회할 수 없는 절대이별 앞에서는 
미움과 후회, 회한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는 듯하다.

끝장나지 않을 것 같던 순간도 결국은 끝을 보게 되어 있다.
돌아가신 큰아버님과 비슷한 내 친정 아버지.....
언젠가는 나와 내 어머니도 죽음의 별리 앞에선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아버질 보내드릴 수 있을까
생각했다.





#2.


시골을 내려갈 때 휴게소에 들러 동서와 마시기 위해 커피와 차를 내 카드로 계산하고 분명
 겉옷의 주머니에 잘 넣어두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게 빈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아침에 일어나 나가려고 겉옷을 확인해 보니 감쪽같이 없어졌다.
예쁜 핑크색 카드 지갑.
그 안에는 내가 매일 사용하는 카드와 현금 7만원 상당, 그리고 대형몰 상품권 2만원, 집 도어락 키가
옹기종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랬는데.....ㅠㅠ


문상객들을 의심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답답한 심정으로 1층사무실에서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하지만 내 눈은 별로 빠르거나 정확하지 못한 편이고 발인 시간은 다가와 있는데다 불이 꺼져있는 타이밍도
상당히 있어서 가려낼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게 언제 사라진 건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다못해 나중엔 기억의 왜곡도 일어났다.
내가 그걸 내 외투가 아니라 가방에 넣지 않았었나? 
온 가방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혹시 휴게소에서 계산하고 길에서 떨어뜨린 거 아닐까.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기억을 아무리
되돌려 보아도 생각이 날 리가 없다.


역시 예쁜 지갑아, 넌 내 곁을 떠난 거구나.
한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과 사랑스러운 컬러 때문에 내가 널 얼마나 애지중지했었니.
이 언니가 소중히 간직해주지 못해 그만 널 떠나보내고 말았네.

상주는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문상객들 상대로 다시 한 번 지갑을 주운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
다고 했지만 별로 기대는 안했다.
나보다 더 덜렁대는 다른 사람의 경우 지갑이든 핸드폰이든 잃어버려도 금방 주인을 찾아가던데
나는 항상 그렇지 못했다.


내가 25살이었을 때였다.
학교로 통학하는 버스 안에서 지갑을 날치기 당한 적이 있었다.
사회 초년생이라 그 당시 월급이 40만이었을 때였는데 석 달 월급을 고스란히 카드 현금인출을 당했다.
뒤로 메는 가방의 앞부분에 찔러넣은 지갑과 누구든 알 수 있는 생일로 된 비번이 문제였다.
그 뒤로 앞 부분에 포켓이 달린 가방은 절대 사지 않는다.

어찌나 억울하고 분했던지 트라우마가 되어 여태 종종 꿈에 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
잠깐 자릴 비웠다 돌아와보니 가방이 열려있고 그 때 날치기 당한 지갑이.....
꿈 속에서 나는 깰 때까지 그 지갑을 찾겠노라 허우적거리고 있다.
깨고 나면 그 기분은 말할 수 없게 찝찝했다.
내 경우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까.


그랬는데도 나는 또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했다.
사실 잃은 돈의 액수보다 이렇게 자책하고
속상해하는 게 날 지치게 한다.
내가 그렇게 지갑을 잃은 이후로 얼마나 조심해 왔는데...
때로는 모든 노력이 무용지물일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좀 더 조심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확신을 못하겠다.
예상치 못한 나쁜 일은 언제 날 공격할 지 모른다.

다녀온 뒤 피곤해서 낮잠을 잤는데 꿈에 또 그 상황이 나타났다.
"너도 참, 이런 곳에 칠칠치 못하게 지갑을 흘리고 그렇게 찾았니?"
아버님이 차 시트 옆에 얌전히 끼어있는 내 예쁜 분홍색 지갑을 줍더니 내게 건네신다.

아, 제발....!
간절한 염원을 넘어 이젠 고문이 되어 버렸다.


빨리 잊어버리는 게 정답이라는 것은 안다.
지갑과 아름다운 이별을 해 보려 노력해보지만 너무 속이 쓰리구나.



보름달
2018-01-27 13:21:23

인생을 사랑하며 산다면 살아가는것이고 사는게 힘든다면 인내하며 견디는것같기도하네요 ㅎㅎ
접속하다보니 눈에 띄어서 감히 읽었고한표시하고갑니다
생활기 수필 공감하며 잘읽었습니다 행복하십시요~~
만년아가씨
2018-01-29 18:12:35

관심 가져 주시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와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HEART
2018-02-19 07:29:16

카드지갑이ㅠㅠ 잊으래야 잊을수가 없지요ㅠㅠ
다만 빨리 더 이쁜녀석을 찾으심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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