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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끊기면 또 만들면 되죠 이게 세상사 입니다 : 14 일째

잊혀지지 않은 유년의 기억

내 유년의 기억중에서도 이런겨울이면 생각이 나는 잊혀지지 않는 서글픈 기억들이 생각난다...내 정도 되는 사람들...그리고 시골서 자란 사람들은 비슷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을거지만 난 지금도 그런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쿵쿵대는 듯한 두려움에 떨곤한다.당시 시골은 어려운 시절이었을거다....도시는 살아보지 않고 경험도 하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도시도 어려웁긴 마찬가지 였나보다...그때 시골에서 자라던 우리들은 겨울이면 두 가지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수시로 동네에 땔감을 검사나오는 산감 출현과.....밀주단속 나온 사람들의 출현과......밀주는 그때 양조장의 수입을 올릴려고 했는지 아니면 국민의 건강을 위해선지 모른다...밀주를 집집마다 만들어 먹었던것이다 그래서 밀주 단속하러 나와서 곳곳을 뒤지고 해서 발견이라도 하면 그 집은 초상집이었다...그 순박한 농민들이 밀주를 어디다 감추겠는가?집안에 어딘가에 감춰도 그런 쥐새끼 같은 단속원의 눈을 속히지 못하고 재수없는 집은 걸리고 만다....걸림 요즘처럼 무슨 과태료나 물었겠지만 어려운 가정에서 그런 돈을낸단것이 죽을 맛이지...어떤 집은 헛간에 짚더미 안에다 감추고 ...어떤 집은 잿속에다 항아리채 감추어도 사냥개 같은 그들의 코를 당하지 못하고 걸렸다 느니......어떤 집은 장독안에 간장안에 작은 항아리에 담아서 간장독안에 넣어도 발견되었다 느니.....단속원이 지나고 나면 그 동네는 발견된 집과 용케도 발견되지 않고 지나간 집들이 화재가 되곤 했다...지금도 의문이 되는것은 왜 밀주를 단속하고 그랬을가?그렇게 심하게 집집을 뒤지고 그렇게 횡포를 하고 그랬을가?주세수입이 감소되어서 그런 것인가?그렇게 건듯하면 나와서 단속하고 해도 왜 밀주를 그렇게 담가먹으려 하고 그랬을가?술이 이런 밀주아니면 먹을수조차 없었을가?그래도 밀주는 어느정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많이 해먹던 술이고 정말로 입에 풀칠도 못할 정도의 사람들은 이런 밀주가 하나의 사치인지도몰랐다....먹기에도 벅찬데 무슨 술을 만들어 먹을 양식이 있겠는가?그래도 밀주는 가진 사람들의 고민이라고 한다면 산감이 뜨는 경우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다..山監(山林 監視員 의 준말)이다 하고 온 동네에 소문이 나면 그 동네는 완전 c.p.x에 걸리곤 만다...산감들은 산림감시원들로 헐벗는 산림을 보호하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져서 강력한 권한과 그들의 횡포하리 만치의 월권행동에도 눈감아준정부 탓도 있겠지만 그 산감이란 단어는 바로 임금인 상감의 출현만치나 공포의 대상이었다....암튼 그 땔감이 어딜가도 없던 시절이라서 너도 나도 인근 산에서 땔감장만하는것이 일년 농사만치나 귀중한 시절이라 ....겨울이면 다들 땔감이 떨어져서 산에 가서 생솔나무를 베어다가 땔감으로 써서 누구집이라도 산감이 들이닦치면 걸리지 않은 집이 없을정도였으니 어찌 공포의 대상이 아닐건가?- 산감이 어느집을 뒤진다 더라.....이 소문은 금방이나 전해져서 들에서 일하다 가고 뛰어와서 생솔나무를 감추느라고 혼비 백산이다...- 땅을 파고 굴을 만들어 위장을 하여 숨겨두고....- 대 나무숲에 위장하여 감추어두기도 하고....- 방안의 광안에 숨겨두기도 하고 .....- 볏짚안에 조금씩 숨겨 두기도 하고 ....갖은 지헤를 짜서숨겨두고 숨바꼭질을 하곤 해도 결국은 어찌 아마추어가 그들의 프로를 당하겠는가?걸리면 죄인같이 그들앞에 울며 불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호소하곤 했었다...보기에도 가련할 만치.....하긴 그 당시에 그 정도의 산림감시를 철저히 하여 이정도의 산림을가꾼것이 아닐가?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너도 나도 인근 산에서 생솔을 꺽어다가 땔감으로 썼던 시절이니....어찌 산에 나무가 그런 방식이 아니면 남아있겠는가?그 산감이란 말은 그 후에도 한참이나 공포의 대상이었다...산감....산림감시원이란 말의 줄임말이란 것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알았었고...그 공포의 대상인 그 말이 얼마나 지난 지금도 말만 들으면 가슴이 쿵쿵 거릴정도의 엄청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참 생각하면 내 유년의 기억은 배고픔과 가난과 그리고 산에서 땔감을 스스로 구해야 사는 원시적인 시대였으니.....??그저 괴롭고 슬픈 날의 기억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산감은 바로 상감으로 인식하던 시절의 애기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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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992 사랑과 고독, 그리고... 7012 독백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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