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46 일째
격세지감
격세지감을 느낀다.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비교한다면...처음 내가 서울시 공직자로 발을 들어놀때에 첫 발령지가 명지실업 전문학교란 간판이 걸려있던 남자좌 2 동이었다.지금은 그 진입로가 아스팔트가 메그럽게 깔린 대로이지만 그때만 해도 겨우2 차선 도로가 포장도 안되어있어 차가 지날때는 흙먼지가 풀썩나고비가 오면 흙탕물이 튀길가 전전긍긍함서 걷던 거리였다..주택가 공지 곳곳이 비어서 허수룩한 가건물들이 쳐 있고...그 중간 지점에 동사무소는 새로 지어 말끔했다..마을 금고엔 동장의 와이프가 호랑이 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유난히 부른 배를 내밀고 걸을때는 보기 민망할 정도로 뚱뚱했지만동장은 정 반대로 뼈에 가죽을 걸친듯이 쇠잔해 보였다...암튼....첫 사회 담당업무다.- 사회 업무란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고 남을 베푼단 의미로 보람있는 일이기 땜에,소신껏 일을 하면 좋은일이있을거다..동장이 아마도 그런 투로 애기햇던거 같다..유일한 교통수단인 버스인 73,74번 버스가 지금도 다닌다첫 발령지라선가?지금도 지난 날의 그 일기를 뒤지면 그날의 감회가 새롭다..여름에 발령 받고 가서 가을이 되고 요즘 정도나 되었을가?찬 바람이 난 그런 늦가을이었지..모래내는 모래가 많은 냇가란 유래서 그런지 모래내 모래내 한다모래내라고 하는걸 일반사람들은 더 잘 알아듣던 시절..그 개천가에 거대한 움막을 짓고 지금의 노숙자들을 데려다가 한 겨울을 지내게 하는 숙식을 해결해 주던 곳이었지..서대문구에 그런 노숙자 시설이 있던 곳이 몇개였다모래내는 냇가를 끼고 있어선지 그 냇가에 그런 천막을 치고 겨울을 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그런 사람들의 동사를 막기 위해서 서울시에서 월동대책으로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움막을 짓고 그 동네의 한가한 사람을 급료를 주고 책임자로 지정 운영하곤 했다..거기에 주식은 라면 정도...예산 관계상 전식을 제공하여 준 것이 아니고 아침만 주고 낮은 나가서 활동하다가 밤에 잠잘곳이 없으면 오는 곳이었다..개천 공지에 거대한 군용막사 처럼 지어진 노숙자 숙소...가끔은 동장과 그 시설을 시찰가서 있다가 오곤 했다..촐촐하면 거기서 라면도 한그릇 끓여 먹고..주택가 공지 곳곳엔 무허가 건물들이 즐비 하고 그래도 겨울을 보내고 철거를 시행한단 조건으로 살게 하던 시절..그렇게도 그 당시의 법은 물렁한 것인지 인정이 살아잇던 시절인지?그래도...요즘에 비하면 노숙자 들에겐 그런 난로가 있는 움막이 있단 사실이 요즘보다는 훨씬 복지 정책이앞섰다 할수 있다최소한 노숙자 들은 따뜻한 난로곁에서 찬바람을 막으면서 겨울을 날수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그때의 모래내 벌판은 집들이 군데 군데 있었을뿐 공지가 많았다임자도 어디 산지 모른 그런 공지가 많았다..그러다가 그 땅이 자기땅이라고 우긴 어쩌구니 없는 짓도 연출되곤 하던 시절이 있었지...그래도 어딘가 인심이 살아서 숨쉬던 시절이었다.가난해도 이웃들이 외면하지 않던 그런 시절...아무리 거지라 해도 겨울동안에 동사해서 죽엇단 사람은 별로 없었다바로 그런 시설이 군데 군데 있었기 땜이다..참 격세 지감을 느낀다.아무리 가난하고 못 살았어도 서로간에 훈훈한 인정이 살아있던 시절지금처럼 이런 삭막한 살풍경은 적어도 그땐 보지 못했었다..과거가 아름답게 보인단 것을 어느 정도 감안하더래도....- imf 당시보다도 1.5 배나 많은 노숙자가 발생했다...이런 우울한 소식이 우릴 답답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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