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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끊기면 또 만들면 되죠 이게 세상사 입니다 : 15 일째

망각할수 없는 기억들

어젠 복진이의 전화가 왔었다.

<임 복진>

그때 헤어진 후로 준자의 딸 결혼식에 첨 봤던 그 친구.

거의 40 년 만인가...

 

그는,

집이 가난하여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몸으로  범박리 고개에 있던 두기네 비니루

공장에서 시장 바구니 마무리 작업을 했던 친구.

당시는,

사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이라 돈을 번단 것은 상상도 못하고 겨우 먹는것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던거 같다.

-내일의 희망이 없어 보였던 시골.

무작정 집에서 탈출하자.

이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다.

19세의 꿈 많은 나이에 모든것을 접긴 너무도 안타까운 일.

무작정 왔던 ㅡ그곳 신앙촌.

허지만 어느곳을 가도 편히 쉴수 있는 형편은 못되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일단 고향을 떠났으니 무언가 이루고 가야 할거 아닌가...

 

무작정 취직한 곳이 바로 범박리 비니루 공장.

<동생 준자>의 애인이기도 했던 두기.

물론 준자와는 먼 친척이긴 하지만 모든것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그의 애인인 두기가 어떤 편의도 봐준건 없었다.

내가 어떤 불이익을 당했음 당했지 어떤 혜택도 없었다.

-왜 두기 아버지는 날 그렇게 못 마땅해 하였는지?

두 사람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던 그 사람인지라 준자 친척인 나도 은연중

미운거겠지.

두기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어찌나 잔소리가 많고 인간미가 없는 사람인지..

찬 바람이 불었다

부전자전인지, 그 사람도 그때 이미 6순이 넘은 연세인데도 젊디 젊은 여자를

얻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7월 중순였던거 같다.

김 승춘씨가 춘천에 작은 공장을 운영한다면서 몇 사람을 델고 떠났다.

거긴 그래도 신앙촌 제품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 돈을 벌수 있을거란 기대겠지.

그때 함께 갔던 사람이 바로 복진였다.

 

춘천부근의 시골 동네에 방을 얻어 몇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제작하고 우린 팔러

다녔었다.

행상였지.

장사라곤 그때 첨으로 해 봤다.

우린 외로워 둘이서 그렇게 함께 다녔다

주인 아저씬 절대로 함께 다니지 말라했는데도 혼자서 다니긴 그렇게 쉽지 않았다.

-저 이 돗자리 얼마죠?

-저 아줌마 이건 신앙촌 제품인데..

그 명성 아시죠?

이 상표 보세요 <zion>상표는 도용못해요 그러니까 안심하고 사세요

좀 비싸시만 그 만큼 제품은 믿을수 있어요

-얼만데요?

-1000원인데 900 원에 드릴께요.

그때 900 원이면 지금은 얼마나 될까?

 

그래서 다행히 몇개 팔면 점심후에 바로 극장행.

둘이는 너무도 좋아해서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었다.

물론 호주머니가 어려워서 그런거지만 헛돈은 한푼도 낭비하질 않았다.

복진이도 나도......

영화는 많이 봤지만 그 스토리는 생각나질 않는다.

<소령 강재구>란 영화를 봤던게 그 시절.

파월장병들 훈련중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부하를 살리고 장렬히 산화한

그 사람 강 재구..

 

여름한철 잘 되는가 싶더니 것도 시들하고 해서 그해 가을에 우린 다시 신앙촌으로

돌아왔다.

그때 복진인 어딘가로 취직하고 난 김 성춘씨의 소개로 안내원으로 들어갔었지.

 

춘천에서의 한 여름 행상시절.

인제, 양구, 화천 등등...

여러곳을 전전함서 다녔지만 강원도인은 신앙촌 제품에 대한 것이 그렇게 좋은것이

아니었다.

수도권을 벗어나서 어떻게 장사하겠다고 그런곳까지 갔었는지........

그때 복진이와 친 형제같이 함께 붙어다님서 고생했던 기억들.

그런 아픈 기억을 잊을수 없나 보다

-자넨 술을 잘 하나?

-난, 4 잔정도가 주량이야.

-그것도 술이야?

난 적어도 세병을 매일먹네.

-이 사람, 그 나이에 그렇게 먹음 어떡해?

그러다가 알콜 중독되면 어쩌려구?

팍 줄이게..

술을 무슨 원수처럼 마신담.......

-나도 그게 어려워,끊는단 것이..

 

사춘기 시절에 만난 우리가 지금은 반백의 머리로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으니 꼭 꿈만 같다.

-효자동 제 9 경리대가 있던 그 자리

-효자 국민학교의 정원에 가끔은 바람을 쐬러 다녔었고..

고향이 그리워 둘이서 불렀던<향수에 젖어>

 

사람은,

행복한 기억보담도 아프고 슬픈 기억을 더 잊지 못하나 보다.

단 몇개월동안의 아픈 기억

그 기억은 내내 지워지지 않고 더욱 생생하다.

너무도 우린 암담한 현실속에서 그렇게 발버둥쳤나 보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실까, 김 성춘씨...

강원도 어딘가에 살고 계실텐데............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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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992 사랑과 고독, 그리고... 7006 독백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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