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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배와 박여사, 선호씨 앤과 나.
다섯이서 천안시티 투어다녀왔다.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거라, 윤 선배가 담당했고 신 도림에서 8시에 급행이 있다길래
8시까지 모였으나, 없었다.
다시 일반전철로 갔지만, 간발의 차이로 천안역에서 버스는 출발해버려 전화하곤
첫번째 들르는 곳으로 택시타고 갔지.
한 10 분정도만 여유를 갖고 모였던들 이렇게 혼비백산으로 택시타고 오질 않을걸....
모든건 경험이 중요하다.
<천안 시립박물관>엘 먼저 들렀다.
넓은 면적에 깨끗한 것이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다.
어느 박물관이든 볼거린 비슷 비슷해서 별로 볼건 없었다.
천안만의 어떤 특색은 찾아볼수 없었다.
구석기 시대의 물건이나 신석기 시대의 화살촉등등..
어느 박물관을 가도 볼수 있는거 아닐까.
두번째는.
<유 관순 기념 박물관>엘 들렀다.
넓고 경치좋은 곳에 자리한 기념관.
조금 떨어진 곳에 유 열사의 거대한 동상이 서있었고, 모든 관람객들은 인솔자의
선창에 따라 만세삼창을 우렁차게 불렀다.
아마도 여기 들르면 으레껏 그런가 보다.
16살의 어린 나이의 이화보통학생을 잔인한 일제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하고 갖은 악형을 가해
수형번호 371번의 모습은 얼굴이 퉁퉁 부어 악형을 당한걸 느낄수 있었다.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한게 뭐 그리도 잘못한 일이라고 그렇게 잔인하게 대했을까?
가난한 아우내에서 만세운동을 했다고 해서 뭐 그렇게도 잘못한 것일까.
오늘 바라본 아우내 장터는 지금봐도 조그만 곳이었는데 1919년 이라면 얼마나 초라한 시장엿을까.
-이런 촌에서 어떻게 그 당시에 서울까지 유학을 가서 이화보통학당에 입학할수있엇을까?
유 열사의 생가에 갔더니 바로 옆에 '매봉교회' 있었다.
교회의 주선으로 그렇게 유학할수 있었단 애기를 들을수 있었다.
차라리 이런 촌에서 살았더라면 그런 죽음을 초래하지 않았을거 아닌가?
이화학당을 다닌 탓에 눈을 뜨고 독립운동을 위한 의식이 살아난거 아닐까.
운명이엇던거 같다.
서대문 형무소의 독방을 그대로 재현해 만들어 놨다.
바로 서도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수 없게 만든 감방.
그렇게 잔인한 만행에 치가 떨린다.
유 관순 열사가 수감 6개월만에 옥사한건 일제의 악형으로 인한 죽음일거다.
갖은 고문과 매질 등등 상상이 간다.
너무도 좁고 가난한 끼가 벤 그 당시의 촌가 유 관순 생가에 잠간 들르니
감회가 깊다.
이런 곳에서 자란 순수한 소녀를 그렇게 악형으로 결국은 죽음으로 몰고간 잔인한 놈들
주인 잃은 생가는 고즈넉히 100년을 그렇게 지키고 있다.
생가를 나와 10여분거리엔,
상해임정의 지금의 국회의장격인 석오 이 동녕 선생의 기념관과 생가를 들렀다.
1940년 광복의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가셔 안타까웠고......
ㄷ 자 형의 그 당시의 생가론 퍽 넓고 크다.
-이 분은 집안 형편이 좋았던가 봐요 퍽 큰데요?
-네, 그렇지요.
지금의 군수집안이라 이 정도였나 봐요.
마루바닥이며 서까래도 모두 그 집의 것을 복원한것이랍니다.
<독립기념관>을 마지막으로 다녀왔다.
15분간 보여준 4 d 스크린.
너무도 실감나고 입체적이라 환상였다.
화면속의 큰 소리가 나면 의자까지 흔들리는 이환상.
참으로 영화의 발전을 보면 기가 막힐 정도다.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아주 오래전에,
여기 와보곤 첨이다.
그 당시의 모습과 많이 달라진거 같다.
그래도, 천안에 오니 볼거리도 많고 후회는 안된다.
나중에 독립기념관에 와서 하루종일 천천히 감상해도 좋을거 같다
입장료는 무료란다.
오는길엔,
천안명물 호도과자를 한박스씩 샀다.
윤 선배의 고향이 천안이라 호도과자의 원조집을 안단다.
의미있는 하루였다.
곤난을 겪은 독립투사들의 치열한 일생을 보면서 감사함을 느낀건 나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