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기면 또 만들면 되죠 이게 세상사 입니다 :
14 일째
어머니
이성부 1오랜만에 하나뿐인 이 아들 만나도말씀 못하시네, 도무지 말씀을 못하시네.모진 하늘이 또 어머니의 가슴에들어와 박힌 것일까?허물어진 흙담 너머로주먹밥을 건네 주시는손길은 뜨겁지만,그 손길은 걱정스레 말을 품었지만,어머니의 입 어둠처럼 닫혀져서말씀을 못하시네.이 집도 마을도 남은 가슴도이제는 모두 내 것이 아니구나.무슨 큰 무서움 하나를 저마다 저마다 지니고 선 이웃 사람들,나를 보아도 큰 눈을 뜬 채손 붙잡지 못하는 사람들,겁에 질린 얼굴들.2밤이그 큰 아가리 벌려마을 삼키기 기다려서나는 다시 정거장 가는 길을 벼와 함께 걸었다.대낮에만 불타던,나를 키운 그 넉넉하던 논길이한밤에도 불타는 것을 나는 보았다.벼 모가지를 뽑아낟알을 맛보아도내 어깨에는 가만히 가만히 힘이 솟았다.어머니, 전 잘못을 범한 게 아니예요.땅과 하늘에 한번도 부끄러워서는 안 된다고말씀하셨지요, 어머니.오늘 새벽 왼종일 느린 기차에 시달리고고향에 내렸을 때,고향은 그 첫마디를 돌아가 돌아가라고내게 소리쳤었다.다급한 목소리 떨리면서한 손으로 나를 숨기고다른 한 손으로 나를 떠다미는,고향은 이미 제 몸을 잃고 있었다.우리집 흙담에 다다를 수 있었음은내 발걸음을그래도 남도의 발이숨 죽이며 대신 걸어 주었기 때문이다.어머니, 그러나 다시 돌아갑니다.서울행 표를 사되, 서울로도 갈 수는 없습니다.결코 저는 죄지은 게 아닌데...3아직도 따스한 이 주먹밥엔반쯤 목맺힘이 섞여 있다.이십년 전에도 삼십년 전에도눈물로 밥을 뭉쳐,급할 때마다 만드시던 어머니를 나는 기억한다.왜놈 순사를 때려 죽였다는 삼촌과징용에 나가시던 아버지에게만들어 주시던 주먹밥을 나는 기억한다.어머니는 하나 뿐인 아들에게마저또 이것을 만들어 주시었다.거리에서 피투성이로 끌려갔다는 삼촌과흰 상자로 돌아온 아버지를나는 끝내 다시 뵈일 수가 없었다.느린 기차는 이 밤에나를 붙잡아 데려가는 것일까?우리들은 모두 이대로하나씩 하나씩 소문없이 사라지는 것일까?기차는 밤을 찢어 밤의 고요를 찢어나아가라고 소리치고 또 재촉하지만,나는 어떻게나를 더 감출 수가 없구나.더 어떻게 누구를 찾을 수가 없구나.혼자로도 혼자를 거느릴 수 없구나.4나주 배를 씹어도 나주 배 이미 슬픔 되어내 목마름 참으라 한다.물이 없고 다디단 시원함도 없고그냥 굶주림을 먹으라 한다.내가 비로소어머니의 주먹밥 꺼내어그 아픔 입맞추었을 때,내 창자 속 깊이 어머니가 가꾸던세월 스며들었을 때,젖과 꿀이 나를 채웠다고 생각했을 때,내가 다른 힘으로 태어났을 때,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어둠 속에 마음을 열어 빌고 또 비는어머니의 저 굳센 모습을.기차는 달리고, 가야할 길은 잃었으나나타날 길은 결코 멀지 않음을.밝아오는 새벽의 흙투성이 얼굴을,힘모아 싸우다가 싸우다가죽어서도 이겨 나오는 사람들을.5어머니의 마음은 저렇게 참 많이 있구나.남모르게 마을 떠나가는 사람들의울먹이는 발길에도숨고 싶은 몸에도그리하여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안간힘에도어머니의 마음은 참 많이 있구나.두려움 무릅쓰고 내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어둠을 뚫어 사슬을 끊어나아가는 젊음 곁으로피끓는 사람들의 곁으로내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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