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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기면 또 만들면 되죠 이게 세상사 입니다 : 14 일째

일상적 남성문화가 문제다 ( 옮긴글 )

초등학교 5, 6학년 때 겪은 일이다. 한 남자선생님이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이쁜 여학생 여럿을 빈번히 껴안고 키스를 하고 가슴을 만지기까지 했었다. 은근히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그 여학생들 중 한명이 이런 선생의 터치에 반항을 했고 그 여학생은 운동장 한 복판에서 선생에게 공개적으로 온갖 욕설과 함께 구타를 당했었다. `건방지게 선생님이 저 예뻐서 귀여워한 것에 반항해'라는 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그 선생의 격분의 요지였다. 이 기억속에서 정말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은 그때 그 선생을 비판하는 마음이 들지도 그런 여론도 일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노로 펄펄 뛰는 그 선생의 행동에 대한 제동은 어떤 식으로도 가해지지 않았고, 그 선생의 성추행은 계속 되었었다. 죄의식 없는 성추행 최근 이른바 `사회지도급'(?) 성추행 사건에 대한 성폭력상담소의 의견 요청을 듣고 `성추행'이라는 검색어로 신문검색을 해보았다. 몇개 신문만을 입력한 사이트에서 한두달 동안 400여개의 관련 기사들이 있었다. 스펙트럼도 다양해서 `장원 총선시민연대 대변인' `이선 산업연구원장' `공주교대 교수' 성추행부터, `초등학교 교사' `고교 체육교사' `노조간부' `학생운동가'까지 사회 어느 한구석의 예외가 없을 만큼 곳곳에서 사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반갑고 서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피해여성들의 이 문제에 대한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신고율이 늘은 것이 반가웠고, 우리나라 여성 개개인들이 날마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접해온 성추행의 지난한 역사가 뼈저리게 드러나는 것 같아 서러웠다. 그런 복잡한 감정을 더 건드린 것은 이런 사건들에 `5·18 술판사건'까지 아울러서 우리 사회 문제를 진단하듯이 붙여지는 `도덕 불감증' 또는 `도덕 어쩌고' 하는 표현이었다. 마치 일상화한 성추행 또는 접대부를 끼고 놀아야 완성되는 듯한 남성 술판 문화에 반대하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도덕이 이전부터 있었다는 식의 이런 천연덕스러운 문제 진단이 거북살스러웠다. 만약 성추행을 저지른 남성들이 특별히 범죄적 의식을 갖거나, 사회도덕의 일탈을 경험하면서 성추행을 했다면 문제는 훨씬 간단하다. 적어도 그래선 안 된다는 합의는 되어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두려운 것은 이들 인사들이나, 아니면 노조지도자, 심지어 학생운동가까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의심이나 해 봤을 까라는 부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상적 진보, 보수성향을 떠나서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처한 계층을 떠나서 이토록 골고루 사건이 일어나겠는가? 5·18 술판사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날에 경건하지 못했다는 실수에 집중된 비난에는 별 관심이 가지 않는다. 특별한 날들에 자숙하는 교훈을 지키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우랴. 오히려 5·18이든 아니든 접대부를 끼는 술판이 문제라고 생각했던 인사가 그때 한명이라도 있었을까 하는 부분에 더 관심이 간다. 우리나라 표준적 남성문화가 바로 그 당시 벌어졌던 술판문화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술판 문화'부터 변해야 성차별이 유례없이 강하고 대부분의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 정치, 경제적 권력과 문화적 보호막과 자기 표현수단을 가진 사회이다. 이런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나 경험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자신의 행동 패턴을 고치려는 남성들의 의식적 노력과 실천의 목소리도 거의 없었고, 그럴 필요를 느낀 적은 있었는지 묻고 싶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성추행에 대해 남성들에게 합의된 도덕 어쩌고 할 기초가 거의 없었던 사회인 것이다. 내가 겪었던 초등학교 교사가 요즈음 남자들 사이에서 진실로 경계되고 극복되야 할 대상으로 비쳐질 것인지 회의가 든다면, 나만의 지나친 비관주의일까? 최근 불거진 일련의 사건에 `앗 뜨거워'식의 조심스러움 이상의 적극적인 변화의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 권인숙/미국 클라크대학 박사과정·여성학 * - 한겨레 신문 칼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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