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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비겁한 후지모리`

일본에선 요즘 하루에 한 두 번씩 TV에 얼굴이 나오는 사람이 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62). 국내에도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일본계 페루인으로 대통령의 권좌에 올라 페루를 10년동안 쥐락펴락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돌연 11월 17일 브루네이에서 열렸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에 참석한 후 일본에 와서는 망명을 선언했다. TV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일본 국민들, 놀라다 못해 참담한 심정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같은 일본인들의 심란한 심정과는 달리 TV에 비친 그의 모습은 너무도 태연자약했다. 수많은 기자들에 둘러싸여 미소를 띄우며 ‘립서비스’를 하는 것도 여전했고, 오랫동안 최고의 권좌에 올라 있었던 인물인만큼 태도 또한 시종일관 당당했다.그가 90년 정직, 근면, 기술이라는 일본인 특유의 강점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페루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 일본국민들은 그야말로 열광했다. 하와이의 사탕농장, 브라질의 사막농원 그리고 허허벌판의 황무지 페루…. 해외에 나가면 무엇이든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당시 일본 정부의 말을 믿고 떠났던 일본의 농촌 사람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꿈’이 아닌 무수한 자갈밭이었다. 그런 자갈밭을 옥토로 바꾸어 놓은 뒤, 이제는 당당하게 대통령 선거에까지 도전한 일본인 2세 알베르토 후지모리. 일본국민들은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아무 조건 없이 그를 도왔다. 결과는 예상 외의 압승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마약, 내전 등으로 인한 최악의 경제파탄이 크게 한 몫했다. 즉 절실하게 ‘엔’이 필요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후지모리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차관 등 이런저런 명목으로 많은 투자를 했다. 덕분에 후지모리는 90년 취임 당시 7600%에 달하는 초인플레를 단시일내에 극복했고, 무역 자유화, 국영기업의 민영화, 고용창출 등 집권 초기에는 그래도 일본국민들을 실망시키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일본으로 망명하다니. 그것도 구마코토에 호적이 있는 이중 국적으로….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한 대학생이 아주 기가 막힌 말을 했다.“후지모리씨가 진짜 일본인이라면 페루에 돌아가서 죄값을 받든지 아니면 일본의 후예답게 할복 자살을 해야 한다. 그게 진짜 일본인 모습이다.”이 말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동조를 했다. 일본인들의 특징은 ‘죽음’으로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 몇 년 전 다케시타 노부히루 전 수상이 뇌물사건에 휘말렸을 때, 그의 비서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자살한 후 사건은 거짓말처럼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언론이나 일본국민들은 누구하나 다케시타 전 수상을 추궁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죽음으로 책임을 다 한 사람이 있는데’라는 것이 전부였다.최근 일본사람들은 더 이상 일본인 망신을 시키지 말고 페루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일본인답게 죽음으로써 그 책임을 다하라고 후지모리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현재 그는 도쿄 근교에 있는 일본의 여류작가 소노다 아야코씨의 집에 머물며, 매일같이 찾아오는 기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주장을 펴느라 대통령 시절만큼이나 바쁘다. 소노다씨의 남편 스웨터를 빌려 멋지게 차려입고 TV카메라 앞에 서는 후지모리씨, 이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은 세 번만 참으면 살인도 면한다는 참을 인(忍)자를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이고 있는 것 같다.( 유 재순 ....在日르포작가)* 동아 일보에서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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