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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동네 서점과 도서 정가제

서른 해 넘게 서울살이를 하면서 꽤 여러 번 이사를 다녔는데 내가 살던 마을들을 나는 지금도 그 동네에 있던 서점과 함께 기억을 한다. 빵집이나 이발소 등과 어깨를 나란히하고 서 있는 동네 서점들은 퇴근길의 내 발길이 저절로 찾아들 만큼 친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책들을 충분히 갖추어 놓고 있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눈치 보지 않고 신간이고 구간이고 마구 뒤지고 슬리퍼 바람으로 나와 서점에서 잡지 한 권 사들고 들어가 종일 뒹구는 일도 서울살이의 재미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직장에 다닐 때도 직장 가까이에 단골 서점이 있었다. 특별히 살 책이 없으면서도 점심시간이면 습관처럼 들여다 보았으며, 돈이 없을 때는 외상 거래도 했다. 한 서점의 주인은 상당한 수준의 독서가여서, 내 작품에 대한 논평이나 그밖에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글이 실린 잡지가 있으면 꼭 챙겨 두었다가 보여주던 일도 생각난다. 지방에 가는 경우에도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은 서점이다. 그 고장에 대한 내 첫 인상도 거기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 가령 전북의 작은 해변 소읍 줄포를 지금도 나는 내가 다닌 가장 인상깊었던 고장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가구점이며 전자제품대리점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서점 때문이다. 1980년대 초, 대로변에 제법 번듯한 서점이 있어 돌아갔다가 책꽂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꽂혀 있는 을 발견했고, 사든 안 사든, 또는 읽든 안 읽든 이 서점에 꽂혀 있는 정도의 고장이라면 녹록지 않은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외국에 가서도 먼저 서점을 찾는데, 베트남에 가서는 가난보다도 온 국민이 돈에 놀아나는 모습에 풀이 죽었다가, 변두리 서점에서 읽지도 못하는 (唐詩選)과 (詩經)을 뽑아 들고 좋아한 일이 있다. 내가 어쩌다 가본 파리를 담박에 좋아하게 된 것도, 생각해보면 담배가게보다 더 찾기 쉬울 만큼 골목마다 있는 서점들 때문이었지 않나 싶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동네 서점을 단골로 찾았다. 대학 문 앞이지만 책을 찾는 학생들이 거의 없어 제대로 된 서점이라고는 그것 하나뿐인 그곳에 들러 필요한 책을 사기도 하고 주문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시내의 큰 서점에 가서 책을 찾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지도 않았고 또 경제적이었다. 한데 어느날 갑자기 그 서점이 문을 닫았다. 학생들의 외면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뒤 나는 거의 책을 사지 않게 되었는데, 돌아보니 이웃들도 마찬가지였다. 동네 서점이 있고 없고는 그냥 가게 하나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가 있고 없고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 아니가 싶다. 인터넷 서점들이 독자들에게 싼값으로 공급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도서를 할인해 팔고 있다. 모처럼 정착될 듯 보이던 도서정가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제일 먼저 타격을 받을 곳은 동네 서점들일 것이다. 이들의 형편으로는 책을 할인해 팔 수 없고, 독자는 싼값에 현혹되어 대형서점으로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 문제는 안 팔리지만 꼭 있어야 할 책, 예컨대 베트남의 같은 책은 할인의 대상이 못되니까 아예 나올 길이 막혀 버리고, 오로지 대형 베스트셀러나 만화 같은 것만 판을 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쉽고 가벼운 것만 찾아 가뜩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양서 출판사들이 설자리를 잃고 결국 지식산업의 기초가 무너진다는 얘기가 된다. 베스트셀러보다 안 팔리는 책, 하지만 꼭 있어야 할 책이 우리 문화와 역사를 위해서 더 중요한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안다면 도서정가제가 지켜져야 할 필요성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으리라. 신경림/시인 * 한 겨레 신문칼럼에서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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