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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기면 또 만들면 되죠 이게 세상사 입니다 : 13 일째

미당을 추모할 수 없는 이유 (옮긴 글)

미당 서정주 선생이 24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추모할 수 없는 이유를 남겨두고 세상을 등졌다. 마쓰이 히데오!/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마쓰이 히데오!/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귀국대원...... 이 시는 '오장 마쓰이 송가'라는 서정주의 친일시중 일부이다. 서정주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익히 많은 사람들이 들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친일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1942년 7월 평론[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다츠시로 시즈오'이라 는 창씨명으로 [매일신보]에 발표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최재서의 주선으로 '인문사'에 입사해 친일 어용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일을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작품들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그가 집중적으로 발표한 친일 작품의 목록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 혹자들은 그 당시 시대상황으로서는 대부분이 친일행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얘기한다. 실제로 문학쪽만 보아도 친일행적 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육사 등 손에 꼽을 정도다. 그렇다면 얼마나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보였는지가 문제가 된다고 해도 서정 주는 친일 행각에 늘 앞장서 왔고 적극적이었다. 그래도 그는 다른 친일 문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친일 경력을 비교적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혀온 바가 있다. 문제는 그가 이를 인정하면서도 당시 자신에 행동에 대한 사과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궤변적으로 늘어놓아 뜻있는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는 것이다. 친일하게 된 연유에 대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는 미당의 고백은 당시 유명한 말이되었으며 어떤 대학생은 이를 비난하기 위해 미당이라는 서정주의 호를 풍자해 '말당선생 보시오'라는 답시를 쓰기도 했다. 게다가 서정주는 5공시절, 권력에 아부한다는 비난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한 뒤 얼마뒤에 만난자리에서 '단군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진 대통령'이라고 미화, 찬양한 사실은 당시 아부의 극치를 보여줘 지식인들의 비난을 받았다. 사실 그 이전 이승만 정권시절부터 그의 아부성행동은 유명한 것이었다. 양지만을 찾아 다니는 습성을 지녔다고나 할까? 어떤 이들은 서정주의 이런 행동들이 그의 문학적 업적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기도 한다. 서정주가 문학을 정치홍보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아부의 도구로 사용한 전래는 어떻게 설명할는지 궁금하다. '글은 곧 사람이다'란 뷔퐁의 말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서정주는 한국 문인협회 사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문단에 대한 영향력도 컷다. 함부로 선배를 비판하지 못하는 풍조도 있었겠지만 그를 감안한다더라도 서정주가 모 일간지에 의해 국민시인으로까지 추앙받으며 노벨상 후보 추천을 5차례나 받았다는 것은(후배문인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음) 부끄럽기 짝이없는 일이다. 민족의 앞에 사죄하기는커녕 자기변명에만 적극적인 사람에게 우리가 그토록 관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그를 비호하는 세력들이 항상 최고의 위치에 있었으며 교묘하게 그의 행적을 합리화시켜 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그의 육신은 과거의 역사속으로 묻혔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서정주에 대한 비판에 대해 그의 논리를 빌어 변명을 대신해 주는 상태지만 역사의 정의는 그의 행적을 낱낱이 기억할 것이다. 하니리포터 최항기 기자 - 한겨레 신문 컬럼에서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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