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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영웅의 추락 ( 옮긴 글 )

서민들 집은 손대지 않고 가진 자들 저택만 털어서 `대도'니 `의적'이니 하며 떠받들여졌던 조세형씨가 일본에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혔다는 보도는 너무 의외다. 출옥 뒤 종교에 귀의해 신앙간증과 선교활동을 활발히 하고, 범죄예방 강연과 전과자 돕기에 앞장서 `의미있는 속죄'를 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에 비추면 그의 어이없는 추락은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다. 하긴 전에도 비슷한 일들이 많았다. 조직폭력배 두목으로 새 삶을 살겠다던 김태촌씨나 조양은씨도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해 다시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흉악범이지만, 재일동포 차별이란 사회 문제와 맞물려 관심을 모았고, 31년만에 출옥해 조국에서 새 보금자리를 꾸몄던 권희로씨가 치정에 얽혀 살인미수죄로 다시 수감된 것은 언론 등에서 만들어낸 `일그러진 영웅'들의 허상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권력을 쥔 큰 도둑들이 판치는 세상에 대한 반발심리로 `조작된 영웅'을 미화하던 사회병리현상에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조세형씨의 추락을 보며 한 인간이 과거를 씻고 완전히 거듭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신앙생활에 기대거나 주위의 격려도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허전한 마음까지 든다. “개꼬리 삼년 두어도 황모 안된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유혹 떨치기 어려운 부패사슬 무엇이 그를 다시 나락의 길로 내몰았을까. 출옥 뒤 결혼해 아들도 얻고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며 성공적으로 갱생한 그이기에 일본에서의 좀도둑질이 더욱 이해가 안간다. “개과천선후 남의 이목이나 체면 때문에 억눌려온 잠재적 도벽이 외국이라는 범죄억제 기제가 약화된 환경에서 터져 나온 것”이라는 설명이 가장 그럴 듯하다. 최근 잇달아 터진 대형 비리사건들이 그의 심리적 저항선을 무너뜨렸는지도 모르겠다.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손쉬운 길이 뻔히 보이는 데, 아등바등 몇 푼씩 모으는 것이 갑갑하고 왜소해 보일 수밖에 없다. 세상 쉽게 사는 맛을 한번 보면 유혹을 떨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논리를 확대하면, 우리 사회에서 고질적인 부정부패나 악습이 사라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점차 투명해지고는 있으나 구조화된 부패가 좀처럼 뿌리뽑히지 않는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과거 챙기던 `촌지'를 일체 받지 않겠다고 결심한 뒤 실제로 이를 지키기가 얼마나 힘들고, 이에 따라 생활이 얼마나 팍팍해졌는지 모른다. 부패가 사슬처럼 얽힌 사회에서 손을 담그지 않으려 할 때 따르는 심리적 박탈감이 얼마나 큰 지는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정치권이나 권력층에서 큰 죄책감없이 `검은 돈'이 오가는 것도 잘못된 악습에서 비롯됐을 터이다. 뭉칫돈을 받다 보면 뇌물이라는 생각보다는 자리에 따른 응당한 사례로 합리화하게 된다고 한다. 우스개 소리지만, 한번 맛들이면 그만두지 못하는 직업으로 거지와 함께 몇몇 유력한 직종이 꼽힌다. 옛 여당이 안기부 예산을 선거 때 전용한 것이 뒤늦게 밝혀져 나라가 시끄럽다. 과거에는 떳떳치 못한 관행쯤으로 여겼는지 모르나, 국민세금인 안기부 예산을 불법 횡령하고도 `야당탄압'이라고 당당히 버티는 것은, 그리 버티다보면 결국 흐지부지되리라는 그릇된 믿음 탓이다. `세풍'도 `총풍'도 견뎠다고 자랑스레 떠드는 넌센스가 통하는 사회다. 정치행태 상식과 동떨어져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총선 때 야당이라고 주장하다가 “그때는 화가 나서 그랬던 것”이란 말 한마디로 다시 여당공조로 돌아서는 몰염치도 “정치는 으레 그런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권력의 단맛을 본 터에 몽니는 부릴지라도 가시밭길을 가려 하겠는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체통없이 정치권을 다시 기웃거리는 것도 권력의 맛을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과의 대화를 내세우면서도 디제이피 공조라는 수적 우위에 기대 손쉽게 정치를 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힘들지만 희망이 보이는 길을 가려하기보다는 당장 편한 길을 선택한다. 상황논리가 판치는 우리 정치에 이상이 숨쉴 비상구는 정녕 없는 것일까.- 한겨레 신문 칼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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