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기면 또 만들면 되죠 이게 세상사 입니다 :
31 일째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언론 길들이기`
'길들이기'라는 말이 요즘처럼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적도 없는 것 같다. '야당 길들이기'니 '언론 길들이기'가 예사로 쓰인다. 북한의 평양 방송에서도, 국회에서도 오르내린다. 지난 해 가을 북한의 평양방송은 언론 길들이기에 대해 우리로서는 당혹스러운 주장을 편 바 있다. '일부 남한 언론은 '민족의 이름으로 천백번 길들이기를 똑똑히 하는 것이 마땅하다.'' 언론 길들이기가 과자 집어먹듯 쉬운 그곳 사회를 드러내는 말이고, 전혀 다른 사회인 남한의 언론까지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어 하는, 당치 않은 통제욕을 나타내는 말이어서, 북한의 변하기 어려운 정치체제를 확인했다는 이들이 많다. '길들이기'는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던 말은 아니다. 한자어로는 '순치(馴致)'에, 영어로는 'tame'에 해당하는 '길들이기'는 동양에서는 주로 말(馬)을, 서양에서는 주로 매를 사람이 부리기 편리하게 훈련시키기를 가리켰으니까 당연하다. 16세기까지는 물론, 17~18세기의 문헌에서도 좀체 그 쓰임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우리말에서 '길들이기'라는 명사형은 쓰인 지가 그리 오래라고 할 수 없다. '길들다'나 '길들이다'라는 동사형은 오래 전부터 쓰였다. '어떤 일에 익숙하게 되다/하다' 정도의 뜻을 가진 단어들이니까, '짐승을 길들이다, 사람을 길들이다'라는 용법으로 확대해 쓰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전부터인 셈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 '길들이기' 항목이 없는 점도 '언론 길들이기'에 쓰이는 '길들이기'가 최근에 생긴 용법임을 증언한다.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짐승을 길들이는 직업이 오래 전부터 따로 있었던 것을 상기하면 짐승을 길들이기도 그리 녹녹치는 않았던 듯하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출연한 영화 'Horse Whisperer'는 일단 길들었던 말이 충격을 받은 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회복조차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우리말에서 '길들이기'가 사람 길들이기로 확대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저 유명한 세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다. 'The Taming of shrew'를 번역하다 보니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되고 이후 '사람 길들이기'가 별 저항감 없이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희극에 속하는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세익스피어의 4대 희극에는 끼지 못하지만 문학 인터넷 사이트(williamshakespeares.com/talk/tamingofhall)나 여러 서평(amazon.com.co.uk/exec/obidos/ASIN/1853260797/needtoknowOe)에 따르면 이 시대에는 공연 시 가장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희곡이다. 1592년 쓰인 이 희곡은 재산이 많은 여성과 결혼하려는 일념만으로 어느 도시를 방문하여 재산은 많으나 성격이 고약하고 험구가인 한 여성과 결혼한 한 남성이 그 여성을 어떻게 길들이는가를 보여주므로 반 여성적일뿐 아니라 반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 희곡을 공연할 때 수 많은 연출가들이 캐더린이라는 주인공을 대가 센 인물로 재창조하거나 길들이기에 저항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런 논쟁의 산물이다. '사람 길들이기'는 말이 그렇지 쉬운 일도 아니고 인간적인 일도 아니다. '언론 길들이기'는 더욱 쉬운 일도 아니고 정보화 사회에서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가 언론 길들이기일 리 없고 언론개혁을 부르짖는 시민단체들의 움직임은 비슷한 운동(americanreview.net/reform)을 전개하는 미국에서처럼 비 당파적, 비 정부적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 한국일보 칼럼에서 (박명자의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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