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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식민지( 퍼온글 )

현기영 일찌기 아메리카 인디언 출신의 한 지식인이, 양키즘은 자기 이외의 여타 문화들을 잡아먹기 때문에 문화라기보다는 암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이 국내의 여타 다양한 민족 문화들을 모두 용광로(멜팅 팟)에 쓸어 넣어 백인 문화의 아류로 녹여내 버리는 현상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데 그 용광로 현상이 지금 미국 국내에 그치지 않고 전지구적으로 번져 나가서 문제인 것이다. 움직이는 용광로라고나 할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의 자본 지배가 개별 국가의 국경을 허물면서 전지구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지금, 주변부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더욱 허약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화마저 유린·능욕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세계화는 민족의 다양성,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약소국의 민족주의 혹은 그 문화는 악, 전근대, 야만, 편견, 무질서로 매도되고, 자기 것은 언제나 선, 근대, 문명, 정의, 보편성이며, `더러운 전쟁'의 수행마저 성전의 위대한 기획으로 호도된다. 바로 이러한 모순적 상황이 9·11 테러 참사의 원인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문화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말고기 먹는 문화와 개고기 먹는 문화 사이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고, 다만 특징과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단일 문화의 전지구적 획일화는, 누군가 말했듯이 `모든 정원을 붉은 장미 일색'으로 만드는 것과 같이 제국주의적 야만 행위임에 틀림없다. 지금의 제국주의는 무력으로 영토를 점령하는 게 아니라, 문화의 위력으로 개개인을 공략함으로써 아래로부터 그 공동체를 허물어뜨린다. 그 문화가 전면에 내세운 경박한 소비향락주의 앞에 개인들은 속절없이 자발적으로 투항한다. 한 개인 속에 그가 속한 공동체가 있고, 그 역사, 그 문화가 있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가 구사하는 모국어 속에 응축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정체성은 모국어와 결부되어 있다. 아니 우리 개개인의 실체는 모국어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나타나 있는 반식민지적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모국어에 대한 영어의 공격이다. 전 국토에 열병처럼 영어 붐이 일어나 너도나도 야단인데, 심지어 아직 주체적 자아가 형성되기 전인 어린이들에게까지 `머리 속에 쥐가 나도록' 무섭게 영어를 강요하는 가혹 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형편이다. 필요를 천 배, 만 배나 능가해버린 영어 인플레이션 현상, 영어가 마치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마저 든다. 국가 경쟁력 운운하지만, 영어를 도구로서 필요한 직종은 극히 적은데, 어째서 전 국민을 향해 무차별로 강요하는가. 참으로 엄청난 국민 에너지의 낭비이다. 그 어려운 영어를 공부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해 버리고 나서, 무슨 여력, 무슨 창의력이 남았다고 국가 경쟁력 운운할 것인가. 창의력은 다름아닌 주체적 자아, 남다른 문화에서 나온다. 모국어에 의해 형성된 주체적 자아는 영어 습득 과정에서 심한 도전을 받는데, 그 때 우리의 심신에 나타나는 메커니즘은 외세의 침략과 그것에 대한 저항의 역학 관계를 정확히 상징해 준다. 공격에 대한 방어의 메커니즘 속에서 구강 근육들의 저항과 함께 지적, 정서적 반발이 맹렬해진다. 이것은 우리가 영어를 습득하려면 모국어의 특징, 즉 이전의 언어 습관 체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영어로 느끼고, 영어로 생각하라”는 명령에 따라, 두개골 안에 새겨진 공동체의 많은 부분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영어로부터 억압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고, 고질이 되다시피 한 미국에 대한 두려움도 아마 그 때문에 더욱 조장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여기는 공동체이지 식민지가 아니다. 우리 문화가 변하더라도 그 고유한 특성을 잃지 않은 변화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남과 구별되는 문화로써 세계 문화의 다양성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우리 공동체의 주체적 존립이 가능한 것이다. 현기영/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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