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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끊기면 또 만들면 되죠 이게 세상사 입니다 : 13 일째

영원한 히로인

 

 

 

우리는 급속히 가까와지게 만든 건 서울에서 열린 62년 아시아 영화제였다. 이미 지미는 미국의 존.포드 감독이 출연을 제의해 올 정도로 거물이 되어 있었다.

의당 아시아 영화제의 히로인은 지미였고 일본 송죽영화사의 기도사장, 홍콩 란란쇼등에서 적극적으로 출연공세를 펼쳐왔다.

지미는 남편인 홍감독과는 이미 대화가 끊긴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도 내게 의견을 구해왔다.

'최선배님, 서울을 떠나고 싶어요. 마침 일본과 홍콩영화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출연계약을 맺자고 하는데 제 생각엔 이참에 당분간 바깥바람이 쐬며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요'

조그맣고 연약한 지미는 홍감독과의 문제, 밤낮가리지 않는 영화 촬영에 극도로 지친듯 했다. 말하자면 스스로를 내던지는 심정으로 해외에 진출해 보겠다는 것이다.

'지미씨, 이문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해. 한국배우는 한국에 뿌리를 두어야해. 토속적인 맛을 잃으면 시들게 마련이다. 또 지미씨 팬들을 생각해봐. 대단한 배신감을 느낄 수 있어. 게다가 홍감독과의 이혼을 전제로 한 도피행위라면 나는 찬성할 수 없어'

지미는 무척 고민하고 있었고 내 몇마디 말에 큰의미를 두는 것 같았다. 아시아의 떠오르는 별이 나에게 위안을 찾는다는 사실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결국 지미는 외국영화사들의 제의를 뿌리치고 한국에, 아니 내 곁에 남기로 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 신뢰는 서서히 남녀간의 끈끈한 정으로 발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때 마침 한중합장영화 <손오공>에 출연제의가 왔다. 지미와의 공연이었다.

3월초 우리는 각자의 복잡한 사생활을 뒤로하고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잠깐 동안의 유예기간일 뿐이지만 우리는 무척 홀가분한 기분이었고 낯선 외국이라는 상황 때문에 다소 흥분된 상태가 됐다.

62년 3월 중순의 어느날 홍콩의 앰버서더 호텔 나의 방에서 우리는 모처럼 푸근한 기분에 젖어 두 사람만의 대화를 갖게 됐다.

주로 그의 해외진출과 가정생활이 화제에 올랐다. 지미는 도피하려는 별, 나는 그별을 붙잡아 두려는 강한 끈이었다.

우리 사이엔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없었다.

지미는 이튿날 아침 내방을 나갔다. 그때 지미의 기분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달콤하고 상쾌한 여진을 느끼고 있었다. 3월 중순의 홍콩하늘은 나의 심정처럼 맑고 온화했다.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필요가 없을 만큼 담백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홍콩에서의 그밤, 우리사이에 분명 사랑의 행위는 있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은 없었다. 우리 두사람 다 사랑한다는 말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밤, 너무나 자연스레 이루어진 행위를 한줄기 바람으로 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미는 물론이지만 나 역시 효실과의 이혼을 염두에도 없었다.

그해 6월 지미의 결혼이 파탄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기자들은 홍감독과 지미의 이혼을 보도하면서 '미남배우 최모군'이 이들 이혼과 상당한 관련이 있음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안양스튜디오에서 <햇님왕자와 달님공주>를 촬영하다 고소장이 접수됐다는 소식을 기자들로부터 전해들었다. 우리는 촬영이 비는 시간이면 동료배우들끼리 둘러앉아 마작을 하곤 했는데 그때도 나는 양석천, 양훈, 후라이보이등과 마작놀이를 하다가 갑작스런 사진기자들의 기습에 크게 당황을 했었다.

기자들은 무척 잔인했다.

'최선생, 간통혐의로 피소됐는데.... 소감은 어떻습니까. 김지미씨와의 관계는...'

동양권에서 최고의 미모일뿐 아니라 '1백년에 하나 나올 여배우' 김지미와 톱스타 최무룡의 간통사건-. 그야말로 그해의 톱화제였다.

62년 10월 31일 밤 10시쯤. 우리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이튿날 조간을 화려하게 장식한 우리의 구속기사는 그와 함께 실린 사진 한커트로 더욱 유명해졌다. 수갑찬 손을 맞잡고 의기양양하게 웃는 우리의 모습은 '악마의 미소'로 명명됐고 팬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 최무룡 스토리 에서 옮긴 글 >



*p.s..
최 무룡,
그 처럼 파란 만장한 삶을 살다간 사람이 있을까?
하늘을 찌를듯한 인기스타에서, 동양에서 100 년에
한 번 나올가 말까한 대 스타.....
김지미와의 스켄들.


사랑을 얻기위해 간통으로 쇠고랑을 차고 차디찬 감방에서
견뎌낸 그.
그리고 이혼과 결혼.
이미 전처 소생의 자녀가 있음에도 부 도덕한 행위로
비난도 받았지만, 그건 자신들의 사랑앞엔 아무것도 아니
었다.


당대 최고의 미남배우와 미녀배우.
누가 봐도 가장 이상적인 만남.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 얻은 사랑.
호사다마라 했던가?


배우의 길을 충실히 걸었던들.......
둘의 관계는 파탄이 나진 않았을텐데..
제작에 대한 욕심으로 투자한 참패..
<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
유명한 말을 남기고 헤어진 두 사람.


헤어진 그의 도미생활과 가난.
재기하면서 금뱃지에 도전.
화려한 국민의 대변자 생활.
그러다가,
조금은 아쉬운 71 세를 일기로 떠난,
영원한 히로인 최 무룡.


우수어린 눈동자와 큰 눈의 그.
외나무 다리에서 부르던 그의 미성.
잊을수 없다.
머리에 깊이 새겨진 스타.
그땐,
내가 너무도 감성적이던 사춘기때라 그랬을가?
다시금 화면에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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