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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시네요 그런 일을 하셧다니..3년 지나도 멀쩡하면 

오지도 않은 5월 세금타령? 부과가 되질 않았는데 어떻 

비가 옥상 식물에겐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5월에 세금 

맞아요.그래서 불효부모사후회란 주자십회훈이 있나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선물을 주니 얼마나 즐거웠나요?부모님 

전 어제 아버지 생각이나서 하루종일 울었어요. 아버지 

맞아요, 세번 바르고 힘들었어요. 그래도 저흰 만족했 

할수만 있다면 하면 좋죠 그런데 그 기술이 과연 그수준 

오늘 수고하셨네요. 배가본드님^^드디어 옥상방수공사를 

일기장에 빨리 오셔서 이런 댓글 달아주셔 감사해요.행복
소사 1신앙촌, 덕소 제 2신앙촌,기장 제 3신앙촌.
가장 초창기에 세워진 곳이 소사 제 1 신앙촌였다.
그리고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이 들어갈수 있는 곳이 제 2 신앙촌
그리고 다음이 최고신앙인들의 거주지 경남 기장 3 신앙촌.
소사에서 안내원으로 함께 근무했던 광남씨.
지금 덕소에서 살고 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자기집에 오란다.
옛날 안내원 시절에 함께 근무한 직원들을
부른단다.
광님씨와 난 거의 막내격이엇던거 같다
나이가 서로 비슷했지만 안내원 중에서
젤로 나이가 어렸으니까...
-아니 그 날이 무슨 날이야?
생일이라던가..
-아냐...
그냥 예전의 사람들 보고 싶어 부른거야
부담없이 와줘.
용산에서 덕소가는거 전철있어
한 40 분정도면 도착할거야..
-알았네..
가장 어려운 시절에 그리고 방황의 시절을 보낸
신앙촌 생활 2 년.
단 2 년간의 생활에서 왜 이렇게 잊혀지지 않고
각인되어 있을까?
한번도 떠난적없는 고향을 떠나 타향으로 간단 것은
쉬운것이 아니었다
허지만 너무도 암담한 장래.
내일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그 와중에서 이모할머니의 신앙촌
애기는 환상의 세계처럼 들렸었다
<그래 내가 탈출하는 길은 바로 신앙촌
으로 가는 길 뿐야..
어떤 선택이 있을수 없어>
-이상향였나?
아니었다
냉혹한 현실이 거기에 있었다.
내가 꿈꾼 그런 이상향이 아니었다.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그럴 야심은 여지없이 깨졌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선 일을 해야 했다
흥미도 없고 소질도 없는 일들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래야만 목구멍을 유지할수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어간 <안내원>
말이 좋아 안내원이지 경비였다
신앙촌을 지키는 수비대.
군대처럼 단체 생활을 했었고
나름대로 젊은사람들과 합류하다 보니
작은 꿈이나마 꿀수 있었다.
입대 하기 전까지........
신앙촌 생활 2 년,
귀가할땐 맨 몸이었다.
겨우 목에 풀칠하기 바뿐 수준의 보수
당시의 안내원 봉급이 800원이라면?
지금 얼마나 될까?
한 10 여먄원??
<신앙>이란 미명하에 노동력을 착취한
그 자들.
다들 그랬었다.
취직한다고 해 보아야 겨우 교통비 정도
모든게 주님사업이라고 하는데야 누가
토를 달겠는가?
암담한 시절에 한때 한 직장에서 몸을 담고
애환을 나누던 친구들
그들과 하루 정도 담소 나는단것이 무의미
한것은 아닐거 같다.
다 예전의 것들은 다 소중한 것들이라서......